▲ 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는 평생 기독교의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힘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유교집안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항일투쟁을 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손 목사는 187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손형준과 오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교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손정도의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

1902년, 손 목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날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손 목사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은 뒤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한 후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이 때문에 미친 자식 취급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간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존 무어)의 목사관에서 일하면서, 190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거기서 김형직(김일성 아버지)과 한 반에 편성되면서 인연을 맺는다. 그는 김형직과 선교사들로부터 미국과 서양에 대한 학문을 함께 배우며 가족간 왕래가 있을 만큼 친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1909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목회사역을 시작했다. 기독교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전파하는 것을 ‘민족해방’의 길로 생각한 그는 일제로부터 자주독립하여 실의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으로 도산 안창호와 전덕기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대 신민회에 가입하는 등, 민족 운동가들과 연대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1년 6월 손정도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고 하얼빈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중국인과 한국인 교포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12년 가쓰라 일본수상 암살모의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는다.

이후 일제는 ‘북간도에 독립무장학교를 세우기 위해 황해도의 금광을 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그를 다시 체포하고 전남 진도로 유배를 보낸다. 1913년 11월 풀려난 후 다시 중국행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길이 막히자,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에서 시무한다. 그리고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재개하여 191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졸업(5회)했다. 그러다 1918년 7월, 표면상 ‘치료’를 이유로 돌연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독립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간다. 그리고 1919년 2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아예 망명하였다. 3.1운동 당시 북경에 있으면서 상해로 옮겨 그곳에 있던 망명객들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고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세력다툼이 거세지자 1921년 임정을 떠나 북만주 길림으로 가서 목회를 하며 교회를 거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예배당과 자택은 의지할 곳 없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 운동가들의 비밀아지트로도 사용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길림지역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손정도 목사는 땅을 사서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농업공사 조성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한인동포들의 삶의 터전이 될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일제가 만주침략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이 악화되어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 19일, 49세의 나이로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세월을 마감했다. 장례는 2월 23일 ‘재만감리교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신학교 동기 배형식 목사가 모금한 1천3백여 원의 돈으로 길림성 밖 북산에 1백여 평 묘지를 구입하여 9월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길림에서의 손정도 목사와 관련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일성 주석이다. 손정도 목사는 친구인 김형직이 사망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된 그의 아들 김성주(김일성)를 데려다 자신의 둘째 아들(원태)과 함께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니게 하고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그리고 1929년 당시 김성주가 비밀 학생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자 옥바라지 하며,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이 일로 김일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 ‘국부’(친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칭했으며 손 목사의 기념사업을 적극 추진하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손정도 목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 김일성 간의 관계도 기구한데, 우선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 초대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여 ‘해군의 아버지’로 불렸고,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차남 손원태 박사는 도미하여 의사가 되었는데,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함께 수학하며 형으로 따랐던 김성주(김일성)와의 인연으로 1991년 김일성의 공식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여 60년 만에 해후하였다. 그밖에 3녀 손인실(YWCA회장, 통일원고문, 한국 적십자사 부총재 역임)씨가 있다.

▲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21회 정기총회 및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 86주기 추모예배 광경.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독립운동의 공을 기리며 손정도 목사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2001년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03년 10월 13일에는 평양에서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손정도목사 기념 평양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교직자의 간판을 가지고 한 생을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자”라고 인정받는 인물이다. 2007년 4월 국가보훈처는 손정도 목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손정도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걸레철학’을 주창한 인물로서 자신이 먼저 목회현장과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몸소 걸레가 되고자 실천했다. “비단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걸레는 하루도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되겠다”는 선언했던 그는 걸레가 자기를 더럽히면서 남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다가 쓰임을 받은 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지고 관심 밖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 손 목사는 항상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높여주었으며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내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김구, 안창호등의 지명도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손 목사는 아직도 일반 대중들에게 낯선 이름이 된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걸레’가 되고자 했던 그의 생활원리는 삶과 목회의 주된 철학이며 신앙고백이었기에 그는 어느 누구와도 불화한 적이 없었으며 가는 곳마다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하며 모범을 보였다.

남과 북에서 모두 ‘독립운동가’로서 존경받는 손정도 목사의 삶을 통해 우리는 바른 신앙인의 삶이야말로 분단을 극복하고 온전한 대한민국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편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제21회 정기총회 및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 86주기 추모예배를 갖고, 기독교정신 바탕으로 항일투쟁 선봉에 섰던 손 목사를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