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장 43~47절)

예수님의 삶은 여성적으로 다정함과 어머니다운 포용심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를 영접하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아주고, 잃은 양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를 가르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어질고, 포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초상화도 대부분 여성적으로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려져 있다.

예수님의 이런 이면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헤롯 왕을 가르켜 여우라고 했다. 또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바리새인을 가르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었다. 손이 범죄하게 하면 손을 잘라 버리라고 했다. 이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단호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성경구절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타협의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를 않는다. 오직 단호한 결단만을 요구한다. 손을 자르고, 눈을 뺀다고 해서 범죄하지는 않는다. 도박에 미친 사람이 두 손을 잘라 버린다고 도박에서 손을 떼는 것이 아니다. 발가락으로 도박을 한다고 한다. 욕심이나 습관을 끊지 않으면, 손을 잘라도 소용없다. 손은 내 의지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의지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헛된 욕망과 터무니없는 교만의 노예이다. 허위와 쾌락의 노예이다. 죄의 노에가 바로 우리이다. 루터는 진지한 신앙인으로서 의지의 노예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새로운 탄생을 말하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의지의 자유를 말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살인을 했다고 할 때, 그는 자유로이 선택해서 살인한 것이 아니다. 원한과 분노, 강한 욕망과 증오에 의해서 살인한 것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라고 해도, 자유로이 선택된 행위라고 보기보다는,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거부할 수 없는 실존적상황의 강제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우리자신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맡김으로써 자신에게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범죄하거던 발과 손을 끊어버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기를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에 매달리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남을 경하시키는 자기를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사는 자기를 떠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명과 과학의 발달 속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러한 단절을 기피하고, 보다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권력과 결탁하며, 부와 명예를 얻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냥 깨끗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한마디로 위선자다. 위선적인 현대인은 먹을 것과 향락의 오락이 풍족할지 모르지만, 영혼에 있어서는 고아와 다를 바 없다. 문명과 과학은 발달했는데, 우리는 더 고독하다. 삶의 깊이도 잃어가고 있다.

사람의 머리는 갈수록 영리해져 가는데, 우직함도 없고, 세련되고 아름다운데도, 단순하고 소박한 맛은 없다. 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회이다. 예수님은 공적활동을 시작하기 전, 빈들에서 40일동안 기도를 하면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받았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지만, 이 땅의 사람들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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