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수강 목사
겉으로 보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모습이다. 이는 가정이나 나라나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성장에 목표를 둔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진작 중요한 일을 빠뜨린 것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이다. 가정에선 먼저 돈을 모아 가정 경제 윤택만을 위해 달려 온 부모들이 어느 날 살만하여 뒤를 돌아보니 자식들에게 제대로 가정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에 후회를 하면서 돈이 다가 아님을 뒤 늦게 깨닫는다.

이런 이유와 같이 성장의 뒷면을 보면 오직 성장만 각하다보니 무엇인가 잊어버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비 성경적이거나 비 신앙 세속적인 요소들에 대해 더 늦기 전 바로잡아야 만이 교회다운 교회 성경에 계시된 교회로 거듭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되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까 우려되는 마음이 앞선다.

독초처럼 자라 교회의 신성을 망가뜨리고 초대교회 본래 모습을 변질케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라도 발본색원하여 더 세속화 되기 전 본래 모습으로 환원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역자들이 먼저 육신의 지혜와 지식, 자존은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다음은 신령한 지도력에 의해 성도들의 세속화가 거두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한다.

지금 수없이 많은 교파가 성경에 맞는지부터 고려해야 한다. 교파가 제정한 교단 헌법이 성격적인지 진단부터 해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헌법에 명시되지 않으면 지키지 않거나, 교단의 헌법이 성경보다 우선하는 제도를 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교파나 교단은 예수님도 비판하셨음을 알고 이제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사도신경을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이를 근거로 정통과 이단을 구별한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지금 대부분 교회들이 사용하는 사도신경이 신앙고백이라고 기록한 곳은 없다. 다만 저자와 출처는 불분명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각론을 한데 모아 성문화한 것이므로 부정 할 수 없다. 다만 이를 근거로 정통과 이단의 구별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준의 잣대가 모호 하면 잣대 자체의 효력에 믿음을 가질 수 없지 않은가?

예배드리는 시간에 대한 성도들의 요구는 지나칠 정도로 비 성경적이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설교 시간도 줄인다. 초대 교회 예배 시간은 온 종일 안식일 지키듯이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현대 교회의 예배 시간이 형식적 순서에 억매이다 보니 진작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보다는 사람에게 보이는데 치중하게 되고, 설교 짧게 하는 자를 유능하다 하니 과연 거룩한 예배가 될까?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교인들이 교회, 가정, 직장, 사회에서의 말과 행실에 믿음과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 교회 밖에서 신앙인과 비 신앙인을 구별이 쉽지 않다. 기독교도들이라고 하지만 일주일 내내 성경 한번 읽지 않음은 물론 대부분 교회에 비치된 성경 때문에 교회에 가는데 빈손이니 성경은 주일 장식품에 불과 하다. 헌금 할 때에 십일조와 주일 헌금과 각종 감사헌금에 대해 교회에 다니는 성도나, 제직이기에,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가지고 있으나, 생활비가 먼저고, 특히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드린다는 믿음 보다는 드린 만큼 받는다는 기복 신앙을 더 선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요즈음 교회에 나타나는 전도에 대한 현상은 교회와 교회간의 윤리와 도덕이 사라졌다. 내 교회 채우기 위해 이웃 교회 성도들이라도 데려오는데 주저 하지 않고, 교회 옆에 교회를 개척하거나 건축하는데 얼굴색 하나 변치 않는다. 동물들은 거의 자신의 서식 범위가 있다. 그런데 교회는 최소한 예의도 없다. 교회가 크면 물량으로 밀어붙이니 소형 교회는 힘없어 당하기만 하고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도 현상유지를 위해 영적으로 성경적인 방법을 떠나 기복을 강조하는 무당과 같이 예수님을 부자방망이로 소개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런데 영혼구원은 뒷전이고 교회에 나오면 모두가 다 부자 되고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주장한다. 고난과 십자가를 설교하려면 교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함이 현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원형에 비하면 그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화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하신 말씀이 곧 오늘 우리들에게 하지 않았을까?

필운그리스도의교회/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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