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종교개혁은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성서에 나타난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벌여야만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예언자 전통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정신은 한마디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도 구약시대의 예언자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언자들은 불의한 정권과 결탁해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던 권력자, 바알 앞에 무릎을 꿇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또한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들 예언자는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던 출애굽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예언자들은 고난을 통해서 바벨탑의 악령을 명확히 보았다. 그리고 이를 집단적으로 거부했다. 이에 대치되는 새 내일을 추구하며, 인정공동체를 창출했다. 이로써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한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등을 꼽을 수 있다. 불의한 권력과 결탁해 맘몬과 바벨을 노래해 온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성서의 예언자들의 정신은 한국교회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불의한 정권을 비호하며, 국민들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불의한 정권을 비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일부 목사는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십자가를 내세워 불의한 정권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또 한국교회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겉으로는 화합을 강조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불의한 정권에 대해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행동이 따르지 않는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론분열과 양극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다.

예수님의 활동 중 하나인 ‘사귀’를 쫒는 일과 배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최태민의 발아래 엎드린 한국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활동은 첫째 구원자의 주체가 하나님이며, 둘째 구원은 어디까지나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셋째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인권회복이며, 넷째 그것을 가르치는 기존의 것과의 싸움이며, 다섯째 궁극적으로 오늘을 지배하는 구조악(사탄)의 철폐를 위한 싸움 속에 오늘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이 같은 활동에 충실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한국개신교는 예수님이 벌이신 하나님나라운동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민족의 현장에서 유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신 한국교회는 민족을 향해 회개와 천국, 영혼구원을 외치며, 권력과 결탁해 교회성장에 급급해 왔다.

예언자의 전통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주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종교개혁 500주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을 맞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회개)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심을 배반한 교회의 잘못을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불의한 권력과 단절하고,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흐르는 교회, 국가를 만드는데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전통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한없이 추락하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나단, 이사야 등과 같은 예언자들이 나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길만이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성서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흐르는 교회, 국가 만드는데 중심에 서라
고통스러운 역사 현장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자

바알신과 맞선 엘리야

엘리야는 예언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아합 왕과 맞섰다. 아합 왕의 왕후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고 바알 숭배를 확산시켰다. 바알 신은 전투를 잘하는 남성 신일 뿐만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농경 신이었다. 바알문화는 북쪽 농경민들에게 쉽게 확산됐다. 아합 왕은 이세벨을 왕후로 맞이하면서, 왕권도 견고해졌다. 이세벨은 야훼 하나님께 도전하며, 예언자들을 살해했다. 엘리야도 체포했다.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엘리야는 3년 동안 북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게 한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 바벨 사제 450명과 가멜 산상에서 비가 오게 하는 내기를 한다. 이 내기에서 엘리야는 비를 내리게 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 내기에서 엘리야가 대승을 한 것이다.

엘리야는 요시아 왕의 재가를 받아 가멜산 산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여러분들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살 것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나님이거든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리고 엘리야는 황소 두 마리를 마련케 하고 450명의 바알 사제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불을 붙이지 말고 그들의 신인 바알신에게 불을 내리게 하라고 했다. 450명의 바알 사제는 몸에 상처를 내면서 불을 내려 달라고 했지만, 하늘은 청명한 그대로였다.

엘리야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 열두 개로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장작을 놓고 소를 잡아서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주변에 도랑을 파고 네 동이의 물을 세 번씩 붓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은 물론, 도랑의 물을 다 말렸다. 바알의 사제 450명도 다 죽였다. 엘리야는 바알 신의 허무함을 이렇게 밝혔다.

엘리야는 이렇게 바알 신과의 대결에서 대승을 했다. 이에 이세벨은 대노하여 엘리야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이세벨을 둘러싼 바알의 세력이 강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담판을 하기 위해 재빨리 호렙산으로 피신했다. 엘리야는 여기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왕상 18장-19장)

출애굽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인들의 영이 집단적인 고난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직시하고 이를 거부하며, 새 내일을 갈망했을 때 히브리인들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어 출애굽사건을 이룩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개신교의 목사와 교인들은 악을 악으로 보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고난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보며, 이를 거부하는 이웃들을 거부하고 있다.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장 15-16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당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르게 알아서 세상에 알리는 중책이 맡겨져 있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시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이웃나라의 악행을 아파한 아모스

아모스는 남쪽 유대나라 드고야에 사는 농민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목자요, 들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암 7장 14절) 그는 유대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나라들의 악행을 보면서, 아파하는 농민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선택했다. 북쪽 이스라엘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한다.

그것은 여로보암 2세 때이다. 아모스는 주변 국가들이 자행하는 악행을 보면서, 걱정하고 아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통한 것이다. 남 쪽 유대땅에서 살던 아모스가 예루살렘이 아닌 북쪽 베델에서 예언활동을 했다. 이곳은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 곳에서 나온 예언자들은 언제나 “야훼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켜주었느냐”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라”고 권했다. 남쪽 유대나라 전통의 예언자들은 그와 반대로 성왕이라는 다윗이 바벨탑을 쌓기 위하여 오용한 하나님을 예언하려고 했다. 아모스는 곁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면서. 호소했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아모스 2장 9-12절)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성지인 베델에 나타나서 야훼의 심판을 선포했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죄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말로 전했다. 다마스쿠스의 죄상을 고발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 다마스쿠스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다마스쿠스를 벌하고야 말리라”(아모스 1장 3절)

다마스쿠스의 죄-“쇠꼬챙이 박힌 타작기를 돌리며 길르앗 부민을 짓바순 죄 때문이다”(아모스 1장 3절하), 가사와 블레셋의 죄-“사람들을 마구 잡아다가 에돔에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아모스 1장 6절), 두로의 죄-“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아 에돔에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아모스 1장 9절하), 에돔의 죄-“동기간에 정을 끊고 칼로 겨누며 달려들었다. 사뭇 증오심에 불타올라 끝내 양심을 풀지 못한 죄 때문이다”(아모스 1장 11절하), 모압의 죄-“죽은 에돔 왕의 뼈까지 태워 재를 만든 죄 때문이다”(아모스 2장 1절하), 유다의 죄-“야훼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고 그 규정을 지키지 않은 죄 때문이다”(암모스 2장 4절하)

아모스가 지적한 악은 권력과 탐욕으로 자신들의 부와 영화를 누리려는 바벨탑의 형태를 고발한 것이다. 철저하게 이웃나라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언언한다.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 낸다. 아비와 아들이 한 여자에게 드나들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저당물로 잡은 겉옷을 제단들 옆에 펴 놓고 그 위에 뒹굴며, 벌금으로 받은 술을 저희의 신당에서 마신다”(아모스 2장6-8절)

이렇게 강자들이 약자들을 짓밟는 것과 바알신전에 가서 바알을 섬기고, 신전창녀들과 놀아나는 것을 질책했다. 그리고 뒤죽박죽된 사마리아 인을 규탄하며,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규탄했다. 한마디로 모두가 바벨의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이밖에도 호세아는 이스라엘 통치자 주변의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백했으며,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왕을 향해 외쳤다. 미가는 그릇된 성전예배를 강조하면서, 과부, 고아, 떠돌이들을 짓밟은 지배층의 죄를 고발했다. 에스겔은 출애굽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예레미아처럼 두루 흩어져 오랫동안 고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고생을 통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이 땅에는 10만 명의 목회자가 있다. 잘못된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을 향해 쓴 소리를 하는 목회자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은 잘못된 정권을 비호하기에 바쁘다. 이들을 향한 대형집회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말하며,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종교개혁과 하나님나라를 말한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성서의 예언자정신을 이어받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자.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론분열을 봉합하는 일에 앞장서자. 이것이 한국교회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은 종교개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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