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여년 전인 1885년 부활주일 20대 중반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이 땅에 복음화를 위해 첫발을 내딛은 곳. 1902년 12월 22일 인천내리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121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로 떠나면서 한인 이주가 시작된 곳. 바로 한국 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인 인천 제물포다.

이처럼 한국 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제물포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 기록물과 유물 등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제물포 문화 아카이브(이사장 고창곤 목사•인천 영락교회)’의 사역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사장 고창곤 목사의 제물포 역사를 담은 기록물과 유물 등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창곤 이사장은 “지금도 제물포, 인천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라며, “제물포 문화 아카이브는 이러한 제물포의 역사에 대해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내고, 고증해 전시회와 발표회 등을 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제물포 지역은 고구려 시대 미추홀현(彌趨忽縣, 또는 彌鄒忽縣)으로 불리다가, 백제가 이곳을 점령한 뒤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됐다. 삼국시대인 372년(고구려 근초고왕 27)부터 475년(고구려 문주왕 1)까지 100여 년 동안에는 중국의 동진·송·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였고, 고려시대에는 서·남해안 지역과 개성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연결되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이었고, 영종도(永宗島)와 배로 왕래했다. 특히 삼남(三南)의 조선(漕船)이 한강에 진입하기 전 정박지였으므로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과 1882년 제물포조약 체결 후에는 개항장으로 급속히 변모해 나갔다.

고 이사장은 이러한 역사가 담긴 제물포와 인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 역사성고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일에 구슬땀을 쏟고 있다. 고 이시장이 기록물에 관심을 쏟는 것도 단순히 기록물이 아닌, 제물포라는 지역 문화 안에 한국교회의 기독교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중한 초기 기독교 역사를 조명하고 보존하기 위해, 인천 지역의 교회 목회자와 장로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 이사장은 “문화를 통해 뿌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고증해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인천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국 최초’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데,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난해부터는 인천 출신들 중 이 땅을 계몽시킨 인물들의 기록과 유물 등을 찾아 새롭게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귀띔했다. 제물포 문화 아키이브를 통해 시청과 구청 등을 순회 개최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는 것.

이에 고 이사장은 “시민들이 방대한 자료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며, 계속해서 제물포와 인천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라는 포부를 내비쳤다.

고 이사장의 국내 기독교 역사와 유물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문화예술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7개 부서 문화위원들 12명 중 기독교 역사 담당이 없음을 인식하고, 관련 부처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기독교 역사 관련 위원을 1명 두도록 만들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독교 관련 역사 유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관장을 찾아가 기독교 유물관을 만들어 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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