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망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뿐이다

▲ 문 현 미 시인
오랜만에 정겨운 시어 “빨랫줄”을 읽는 즐거움이 밀려온다. 빨랫줄이 있는 동네는 사람 사는 냄새가 구수하다. 산비탈 아래 집들이 오밀조밀 있다 보니 골목길 돌다가 부딪히고 연탄불 갈다가 만나곤 한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수시로 만나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햇살 좋은 날이면 옥상의 나일롱 빨랫줄에 알록달록한 꽃무늬 팬티, 축 늘어진 런닝구, 파자마, 양말 등이 잔뜩 걸려 있다. 이런 풍경은1960년대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인이 소재로 선택한 것이 빨랫줄이고 동시에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잊혀져 가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추억 속에 머물고 있는 것들을 시의 공간으로 불러 낸다. 제목에서부터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높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바람이 살랑 부는 봄날은 빨래 널기에 참 좋다. 봄바람에 깨끗한 빨래가 흔들거리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생각이 가득해진다. 때로는 소쿠리 들고 들녘에 가서 쑥을 캐거나 논두렁, 밭두렁을 걷고 싶은 상념에 잠기게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소박하고 느슨한 감정 대신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을 선택했다. 빨랫줄을 서정적 밀도가 높은 이미지로 압축한 것이다. 서정시에서 흔치 않은 ‘그것은 –이다’라고 단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독자를 순간 긴장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의미심장한 문학적 수사가 이어진다. 즉 빨랫줄이 다시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로 바뀐다. 서정성이 짙은 제목과 달리 시의 상반부에서 예리한 긴장을 유지하다가 구체적인 시어 “빨래”가 등장한다. 빨랫줄에 걸리는 것은 빨래만이 아니고 봄바람도 걸려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풍경이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의 상상 날개가 자유자재로 빗방울이 걸린 빨랫줄에 머문다. 아슬하게 달린 물방울이 “즐겁다”는 의인화를 통하여 독자도 읽는 기쁨을 만끽한다.

하지만 다시 긴장 모드로 돌아간다. 접속어 “그러나”를 선택함으로써 이완이 된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시인은 빨랫줄이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이라고 강조하면서 눈부신 서정의 세계로 이끈다.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뿐”이라는 마지막 표현은 시인의 문학적 역량을 단번에 가늠하게 한다. 이 시는 긴장-이완-긴장의 시적 구조를 중심축으로 명편 서정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붉은 그리움으로 진달래가 피고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날이다. 이제 마음의 빨랫줄을 찾아서 파란 꿈을 매달고 새봄을 맞이하면 어떨까.

백석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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