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올바른 지침을 주려는 목양적 관심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성경에 입각하여 허망한 미신숭배와 면죄부 판매를 거부한 후, 전체 교회를 재건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립하여 나갔고, 성경적 가르침이 널리 확산되었다. 중세 말기에 내려오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과 성례주의 신학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은 결코 소수의 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엘리트 신학자들의 학문적인 운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대학에 소속된 학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던 목회자들이었으며, 일반 성도들이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서 열심을 내어 성경을 탐구하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도되고 있음에 탄식하였다. 그의 목회적 고뇌와 두려움은 중세교회의 왜곡된 가르침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 교회의 출입문 광고판에 95개 조항을 1517년 10월 31일에 내걸었다. 그 다음 날이 만성절이었다. 루터의 심각한 고통으로 빚어진 “우발적인 사건”은 가히 획기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주어졌고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일련의 토론들은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로마 교황청의 모순을 지적하고 싸우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심점이자 산파역을 해 낼 수 있었다. 당대 로마 교황청 학자들과 대립적이던 루터의 선구자적인 고뇌 속에서 실행된 하이델베르그(1518년)와 라이프찌히(1519)에서의 논쟁들은 위대한 역사를 형성하는 나침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정말로 루터는 행운아였다. 그가 꼭 필요로 했던 것들이 주어졌다. 첫째는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서, 프레데릭 3세의 배려와 동료들의 성원이 함께 했다. 그리고 출판업이 발전되어서 모든 저술들이 재빠르게 보급되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루터의 결정적인 성공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시련을 당하게 되는 여러 차례의 토론들과 논쟁들은 결국 루터가 성경을 재발견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시련을 통해 얻은 문제점들을 선명하게 성경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여러 차례의 논쟁들은 루터에게 엄청난 깨달음을 인식케 하는 사건들이었다. 1521년,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의 루터의 진술들은 더 이상 종교개혁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데 결정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곧바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한 루터는 최초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종교개혁이 성공한 독일에서는 모든 성당들이 루터파 개신교회로 재편되어지는 국가교회 체제가 정착되었다. 루터파 교회는 지난 5백 년 동안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국가 전체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현재 독일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고 루터를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가 한 말이나, 그가 쓴 글이나,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밝혀내는 일은 독일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주도하여 왔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어지고 있다. 아데나워 수상이나 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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