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인간의 존엄과 평등, 생명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계기로
2025년 사순절 - 그리스도인의 신앙성숙을 위한 영적여행으로 승화
사순절, 영적여정 그 종착은 부활절
사순절 2주째를 맞고 있다. 개신교에 있어 사순절은 의무적인 규율보다 개인의 영성성장을 위한 도구로 재해석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70%이상이 사순절기간에 특별예배를 진행하며, 금식 하는 등 특별한 행사를 진행한다. 이를 복음적 의미의 재발견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순절은 영적여행의 여정이며, 교인들의 신앙훈련 과정이다. 특히 사순절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부활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총화로서 부활의 완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루려고 했던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사랑, 생명을 우리의 삶속에서 실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사순절을 영적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서구의 역사나, 세계역사는 예수님 없이는 말할 수 없고, 이행할 수 없다. 예수님이 가르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은 현대사회의 기본바탕이 되었고, 모든 나라의 헌법 역시 여기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다.
1세기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상상을 초월하는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대사회의 모든 사상과 사회제도에 근본적인 골격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얻는다. 그의 가르침의 목소리는 제자들과 목격자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면서까지 인간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의 힘은 인류역사의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너의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인류 역사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의 힘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저술가나, 철학자나,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공자도, 세익스피어도, 강대국의 대통령도, 예수님과 같은 권위는 없다. 위의 예수님의 말은 예수님의 신적권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이다. 십자가의 희생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의 어리석은 사랑, 아가페는 약하게 보이지만, 강한 힘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죽음의 권세를 굴복
사순절기간 형식적 금식보다 내적 회개중요
사순절 금식 성경적인가(?)
십자가의 희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힘과 죽음의 권세에 굴복시키지 않고, 그것을 깨트리는 승리하는 힘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 문서들이 사실을 기록한 사건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다. 십자가의 처형은 구역성경에 있는 수 천년동안 내려왔던 메시야와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 역사적 사건이다.
성경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개신교인들에게 금식을 가르친 일은 거의 없다. 종교개혁자 루터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강조했다. 형식적인 금식보다 내적 회개를 우선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사순절을 폐지하는 내용의 문서를 내 놓았다. 사순절을 로마가톨릭 전통을 잇는다며, 무의미하게 여겼다. 루터의 관점에서 “금식은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표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다.<기독교인의 자유>
개신교 사순절의 핵심가치는 첫째 말씀중심의 회개에 있다. 예수님의 수난서(마태복음 26-28장)를 집중 묵상하고, 설교주제를 광야 40일(마태복음 4장)과 거듭남의 요구(요한복음 3장) 등 복음적 메시지를 선포하며, 사순절을 재해석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순절기간 절제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매일 성경구절을 기록하며, 영적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또한 이를 매일매일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둘째 자발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음식 금식 대신 SNS를 비롯하여 술, 정욕 등 현대적 유혹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즉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기도회에 참석하고, 매일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을 하는 등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무리한 단식보다는 간헐적인 단식, 채식위주의 식단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이 사순절기간 보이기식 40일 금식기도를 단행,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실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금식으로 절약한 비용을 가난과 질병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쓰여 질 수 있도록 기부하는 것은 물론, 이념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국민통합과 화해, 가족과 이웃에게 편지쓰기, 인간의 탐욕과 욕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 자제, 한반도와 세계평화 등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가 부활절 헌금을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지출했다. 사랑의 헌혈에도 참여했다. 헌데 교인의 감소와 함께 교회의 재정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부활절 헌금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랑의 헌혈에 참여하는 교회도 크게 감소했다. 극우단체를 후원하는데 헌금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국민통합과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생명을 우리 삶속에서 실현
초대교회의 사순절은 낡은 사람,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았다. 세례를 받기 위해 경건과 절제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훈련하는 과정으로 삼았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이 초대교회의 사순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낡은 삶인 죄의 삶, 방탕한 삶, 죽음에 이르는 삶, 생명을 잃어버린 삶, 갈등의 삶, 분열의 삶, 적대적의 삶 등의 죄는 예수님이 짊어지고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사순절 그리스도인들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을 준비하는 영적여정, 신앙훈련의 계기로 삶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분명 사순절은 신앙훈련의 여정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완성하는 통로이다. 헌데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며, 교회가 해야 할 사회적 책임, 역사적 책임, 정치적 책임을 망각한다면, 2025년도 부활절은 하나의 절기에 불과한 무의미하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했다. 마태복음 6장16-18절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식기간에는 잔치도 할 수 없다. 절제된 마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금식은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먹을 것이 있으면서 금식하는 것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식욕과 탐욕 등 여러 가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금식과 절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갈망했던 참 사랑의 길, 참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의를 향한 갈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 갈망이다.
생명, 새로운 공동체로 이끄는 공동체를 말한다. 사순절 기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한다.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에게로 예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위 성경말씀은 위선자들의 가식과 싸우라고 한다. 한마디로 불의에 맞서라고 한다. 겸손하고 진실하라고 한다. 올바른 금식은 남에게 가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금식은 나쁜 결과를 가져다가 준다.
함께하는 금식이 필요하다. 함께하는 금식은 공동체를 살리고, 사랑과 생명이 강물처럼 흘러 넘친다. 금식은 분열과 갈등, 시기와 질투 등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이사야 58장1-9절의 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대답해 준다.
함께 나누고 공동체를 위한 금식 절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1)온갖 일을 시키는도다/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 겉만 보여주려고 했다. 이는 욕망과 탐욕에 가득 찬 위선이었다. 참된 금식은 침묵하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것은 함께 나누고,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때문에 금식은 묵묵히 수행해야 한다. 헌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구약시대의 위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금식에 매몰되어 있다. 어떤 부흥사 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10번 했다고 부흥회에서 교인들에게 자랑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이다.
위선적인 금식을 자랑하지 말라
이 목사의 행동은 위선이며,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행위이다. 참된 금식은 묵묵히 수행해야 한다. 금식한 것은 함께 나누고, 공동체를 위해서 행해야 한다. 성경 곳곳에 나라와 민족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뼈를 깎는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국 속에서 국민들은 둘로 가라져 이념갈등을 벌이며, 교회는 극우화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다 남북한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언제 어디에 핵폭탄이 떨어져 많은 국민이 죽음을 당할지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의 상황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상처받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뼈를 깎는 마음으로 금식하고 나라와 민족, 국민통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사도바울의 편지를 잘 받아들이고, 이를 행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근심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라/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1)잠길까 두려워하노라/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그리스도의 향기/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마음 가다듬고 절제된 마음으로 부활절 기다리자
그렇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가 없다. 바울은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편지로 인해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다.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 화해했다, 교회는 새롭게 태어났다. 오늘 한국교회는 근심걱정에 쌓여, 교인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신앙생활을 한다.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교회의 신뢰도를 한 없이 추락시키고 있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교회에 대해 교인 중 60%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양심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인들을 향해 화해자, 중재자의 역할에 충실하라”고 촉구한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계엄과 탄핵의 정국 속에서 양분된 국민통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울분과 억압을 당하는 민족의 아픔에 함께하며,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 새로운 공동체로 이끄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절제된 마음으로 부활절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부활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사순절 한국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