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의한 평화 외치는 교회, 환경을 말할 자격 없다”
세계 환경의 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보존해야 할 교회
환경을 말할 자격조차 상실한 교회
6월5일은 세계가 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었고, 25일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금년도 환경의 날은 제21대 대통령선거에 묻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해서 곳곳에서 환경의 날 기념식을 거행됐다. 그리고 각종 언론매체는 환경의 날에 맞춰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다큐멘터리도 방영했다. 분명한 것은 깨끗한 지구환경, 건강한 지구는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
특히 미국 등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며,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는 한국교회는 환경, 예수님의 평화(샬롬), 성령을 말한 자격조차 상실해 버렸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건강한 지구와 깨끗한 환경을 위해서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일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심에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를 외치며,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 국가들이 있다는데 안타깝다.
세계가 건강한 지구와 깨끗한 환경,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전을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강대국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후진국들은 강대국들이 불러일으킨 재앙을 강대국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브라질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등의 개발도상국들은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마구 파헤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 나라는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재앙에 함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환경운동가들은 인류 모두가 멸망하느냐(?), 안하느냐(?), 생사 위기를 실감하고, 이것을 미리 막아보자는 입장에서, 예언자적인 각성에서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늘 세계가 무기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의 환경운동을 말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평화운동이 담보되어야만 건강한 지구, 깨끗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자연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이성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비이성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환경운동의 중요성이 그만큼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한 목사는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한민족의 해방과 관련해서 “만주 벌판에 독립군은 없었다. 원자탄 2방이 해결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는 이성과 책임을 잃어버린 무책임한 말이다. 오늘 극우화된 한국교회 안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얼마인지를 모른다. 교인들은 이 말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 목사는 일제 36년의 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한 한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역사를 몰각한 결과이며,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샬롬을 부정하고, 강대국의 힘에 의한 평화, 팍스를 극찬하는 발언이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목회자들이 있는 한 한국교회는 환경과 평화(샬롬)을 말할 자격조차 없다. 결과적으로 평화가 담보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할 수 없고,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핵에 의해 멸망을 예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장조세계의 화해 절실
세계가 보유한 핵, 지구를 20번 초토화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핵에 의해, 공해로 인해 죽어갈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1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파괴력에 세계는 경악했다. 그리고 세계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사람이 이성적이라면 이런 무기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8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 번에 1억명을 살상할 수 있는 가공할 살인무기를 만들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북한 등이 보유한 핵무기는 지구를 20번 초토화시킬 수 있다. 어떤 미친 한사람이 단추 하나만 누르면 인류가 멸종할 수 있는 위기에 놓여 있다. 그 살상무기는 오늘도 경쟁적으로 계속해서 개발되고, 생산되는 등 무기경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한마디로 창조세계가 무기경쟁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 이렇게 생산된 무기는 가난한 나라로 팔려 나가고 있으며, 새 무기가 개발되면서, 낡은 재래무기는 어디엔가 버려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 무기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번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와 그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6.25한국전쟁을 경험한 남북한 민족은 전쟁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향한 행진을 멈출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전쟁으로 죽고, 여기에 희생당하는 자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며, 이를 통해 크게 돈을 버는 사람은 무기 상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강대국들이다.
오늘 세계는 인류를 하루아침에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느 독재자가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발작을 하면,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다. 그래서 인류는 불안한 시대에 살 수밖에 없고, 살고 있다. 이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화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전쟁은 내가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함께 죽음의 길로 가는 길이다.
분명 세계인 모두는 살기 위해 무기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북한과 미국은 핵단추 크기의 경쟁을 벌였다. 북한의 김정은은 “내 책상 위에 핵단추가 있다”고 했다. 또한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의 책상 위에 더 큰 핵단추가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핵무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양심도, 도덕도, 종교도, 신앙도 없다. 자국의 실리만 있다.
평화(샬롬)를 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성령강림절, 성령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의 행렬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 중심에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환경의 날, 잔인한 6월 달, 성령강림절을 맞아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예수님이 말한 샬롬, 평화를 위해 일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화를 말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갈등과 반목을 부추기며,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를 외친다.
그리고 죽어가는 생태계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샬롬)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나, 팍스를 외치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오늘 세계는 생태학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인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세계가 무기경쟁을 벌이면, 얼마안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생태학적 위기가 찾아온다고 예언자적인 절규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무기경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기술문명을 독점하는 자들이 이런 예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기술문명을 내세워 바다 또는 지구 밖에서 자원을 발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이들은 이를 통해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 세계가 사용하는 화학물질은 농업과 공업 분야에서만, 8만 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분명 이것은 독이다.
그것을 땅에 뿌리면 그 땅은 못쓰게 된다. 더 독한 것을 써야 한다. 또 이 화학물질은 대기오염을 유발한다. 이러함에도 이 땅에는 매년 1천여종의 새 화학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공해로 매년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면적의 산림이 파괴되고 있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가서 지구의 3/1이 불모지로 변할 지도 모른다.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식물이 멸종되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줄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이 사람과 동식물이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이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화석연료의 사용량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갈수록 탄소가스량이 늘어나 지구의 온도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다고 아우성친다. 동식물에게 치명타를 안겨주고 있다. 결국 공업화는 지구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균열을 가져다가 주고 있다.
기계는 멈추지 않고 있다. 과잉생산을 해, 이를 판매하기 위해 미디어를 동원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환경오염이라는 결과를 가져다가 준다. 하나의 예로 인간이 입는 의류의 10%만 재생되고, 나머지 90%는 태우거나, 땅에 묻어 공해가 된다고 한다. 죽음에로 향하는 인류의 행진을 누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국가이기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세계정치구조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인간의 정이 고갈된 몰인정한 사회
국가이기주의로 인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공해로 죽어가고 있다. 세계 식량생산의 50%는 세계인구의 20%도 안 되는 선진국에서 소비한다. 이른바 선진국이 사용하는 에너지 사용량이 가난한 나라 국민의 40배가 넘는다. 한마디로 미국 국민 1인이 아프리카 40인이 쓰는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기형적인 에너지 사용은 가난한 나라의 국민 5천만명이 매년 굶어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는 사막화로 인해 줄어들고, 공해로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문명의 이기가 불러온 재앙이다. 한마디로 문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사람과 함께 사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하며, 함께 살아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기계와 다르다. 사람은 이웃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사람이다. 고락을 함께 나누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새로운 나라를 창출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도도, 윤리도, 도덕도, 애환도 있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와 능률을 가져다가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로 인해 인간사회는 비정상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서구는 벌써 그 비극으로 인해 울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기계화 된지 오래되었다. 아이들과 부모간의 인정이 고갈되었다. 그것은 너를 위해 주고받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정이 고갈되어 몰인정한 사회로 변화되었다는 얘기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을 테크놀로지에 내맡긴 결과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오늘까지 국가안보 논리에 빠진 나머지,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군축반대운동도, 평화운동도, 남북한민족의 화해운동도 전개할 수 없었다.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맞서 대한민국은 전투기 생산과 미사일 개발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 물건들이 어디에 쓰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북한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상황이다. 분단된 상태에 있는 남북한은 분단 80년 동안 경계하며, 전쟁 준비에만 몰두해 왔다. 서로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 남북한민족은 서로 죽여야만 하는 적이다. 남북한민족의 갈등과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과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은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담보해 내지를 못했다.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분단이 고착화되었고,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준비에 몰두해온 결과이다.
한민족은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한 우리민족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우리의 땅에서 결정할 수 없다. 여기에다 인간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이라면 가족도, 이웃도 없다. 사람을 살해하면서 빼앗는다. 존속살인도 마다하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린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기대어 사는 세상
뿌리 없는 떠돌이들은 윤리와 도덕의 울타리를 허물어 버렸다. 여기에다 정부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돈으로 처리하려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렇다 보니 국민의 삶의 현장은 피폐해져 가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보면, 고발대상인가, 아닌가를 생각했다. 이제 사람은 일당 10만원, 7만원, 15만원 짜리로 계산된다. 독재정권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도 의식화집단, 아니 반정부음모단제가 아닌가 하고 사정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대전민중교회에서 모임을 가진 한울회 모임은 순수한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성경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런데 국가는 이 모임을 이적단체의 모임으로 규정했다. 이 모임에 속한 김종생 목사를 비롯한 이규호 전도사, 박재순 목사 등이 ‘공동체 모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렇게 피조물들이 죽음에로 줄달음치고 있는 동안에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70-80년대 성장하는 한국교회를 보고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과 유리되어 있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미천한 사람,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에 벌이지 못했다. 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권력의 주변을 맴돌고, 권력의 시녀노릇을 했다. 교회 안에 인권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홀로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 존재의 가치를 찾지 못했다. 너를 살리기 위해, 집단을 살리기 위해, 민족을 살리기 위해, 세계민족을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길을 선택하지를 못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며,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아야 한다.
자기십자가를 지고, 역사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참 뜻이 아닌가. 선교는 죽음에서 헤매는 사람을 살게 하는 행동이다. 그러기 위해서 잘못된 세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육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죽음과 고통을 뛰어넘는 부활, 새로운 삶의 길을 교인과 국민들에게 보여주지를 못했다.
교회는 고뇌와 죽음을 몰각하고, 행복과 영광만을 약속했다. 기독교는 그것이 아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역사적, 정치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직시하고, 세계민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무기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것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임당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는다면,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그것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대한민국, 건강한 세계,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균열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하나님과 자연,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선교의 사명이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살인무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한 이런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