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7월 법의 달 특집(2) … 신약성경에 나타난 법정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인권보호에 중점
법은 사람의 인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신구약성경의 법정신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인권보장과 생명의 존엄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기득권층인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 법’과 ‘정결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한데서 알 수 있다. 모든 법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있다. 그래서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언도 한마디로 안식일법과 정결 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떠돌이 등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선언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황에서, 안식일법과 정결 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선언은 복음이었다. 기쁜소식이었으며, 하나님의 참사랑이었다. 부자들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한국교회는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법정신과 구약성경의 법정신이,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함께 나누고 섬겼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개신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유행처럼 교회의 내규, 교단의 헌법, 노회의 법규 등을 만들어 정적을 쳐내는데 악용하기에 바쁘다. 이는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교회의 내규는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기득권자가 된 목회자 개인을 보호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그렇게 악용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마디로 노회의 법규와 총회의 헌법, 교회내규는 치리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 이러한 법과 내규는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켜 교인을 치리하고, 동역자를 이단 및 사이비로 만드는데 철저하게 악용돼 왔고, 악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치적인 이단사이비가 얼마인지 모른다. 개신교회는 성서의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워 교인 간, 교단 간, 목회자와 교인 간, 교단내의 분규, 담임목사와 원로목사간의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회 법과 제도, 교인들을 옭아매는 법과 제도로 전락
일부 목사 7계명서 일탈, 마이너스 성장 원인으로 작용
교회의 모든법 불의한 기득권자 위해 존재
한국교회 작금의 교회 내규나, 법규, 헌법은 교인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목회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가 되어버린 힘 있는 담임목사, 교권주의자들을 위해서 있다는데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런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끝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 중 상당 액수가 소송비용으로 새어나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분쟁으로 변호사만 좋은 일을 시킨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한마디로 교회분쟁으로 파생되는 소송 때문에 변호사들이 먹고 산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도 많은 교회들이 사회법정에서 수십건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이런 사이에서 많은 교인들이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성락교회 분쟁, MBC PD수첩의 <다락방과 목회자들> 방송 이후,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 이로 인해 교단과 교회가 분열되고 있다.
대형교회의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욕심쟁이로 변질된 기득권자들이 자신을 지키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내부의 다툼은 교인들에게 상처만 남길 뿐, 교회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득권자들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중재자로서,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가 열린다. 그런데 화해자여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다툼의 중심에 있고, 다툼을 부추기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한국 중대형교회의 다툼과 신구약성경에서 이탈한 목회자의 모습이 보도될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물론, 교회의 신뢰도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개신교회는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한다. 한국개신교회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언론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며, 사이비이단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다툼과 분열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평화(샬롬)’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윤리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독생자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느냐 아니면 아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느냐”고 오늘을 살아가는 기득권자로 자리매김을 한 그리스도인에게 묻고 계시다. 모든 법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 모두는 법 앞에서 평등하다.
피묻은 손에 기도할 때도 성경구절을 악용
예수님의 선언대로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사람은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와 제사장을 내세우고 있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동원,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괴롭혔다.
바리새파는 신구약성경에 법에 담긴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따르며, 이를 지키지 않는 교인들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한 결과이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 탐욕과 욕망에 익숙해진 기득권자인 목회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신구약성경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국민 전체를 기동화 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는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고,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삶의 현장인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철저하게 악용한 안식일법, 정결법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제계층에 국한된 정결법과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산시켜, 이들을 악마화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해서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교회당을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교회에 나오기 전에 몸을 정결케 하라” 등등 성서와 대치되는 천박한 말들을 강단에서 외치는 것은 바리새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말들은 매일매일 식량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거나, 운전수, 열차기관사 등 주일날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결과이다. 예수님 당시 정결법은 생활전반에 파급되어 있었다. 정결법은 가난한 자, 병든 자, 불구자, 불결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에 예수님과 충돌의 계기가 된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손 씻는 것은 제사 전에 사제가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제법에 따른 것임에도, 종교적 권위로써 제재하는 법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가난하게 생활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도 되지 못하고, 사람을 삶에서 유리시키고, 정죄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바리새파인은 사람의 삶의 현실보다도, 그 법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문제로 삼았다. 이것은 분명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파의 입장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곳은 못 가진 자들의 구체적 삶의 자리이다. 구약의 법정신에 따르면, 배고파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모세의 법으로 생활규율을 세우고, 모세를 권위로 내세우면서, 그 기본정신에는 아랑곳하지를 않고, 단지 안식일 법, 즉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시각에 경직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또 사회적 약자인 한 손이 오그라진 자를 고쳐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불구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곧 모세의 법정신이라고 했다. 바리새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안식일 법에 위반되었다고 고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안식일법 제정의 본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법의 정신에서 유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조문을 바리새파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는 이야기다.
또 모세의 법은 이혼했으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들이 이 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했다.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혼을 편법으로 삼았다. 이런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다. 여기는 곳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며, 역사의 현장이었다.
율법은 남성중심에서 해석되는 오류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법에 대한 입장이 단호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셨다. 이 말은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법은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데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것을 방해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법을 파괴하지 않았다. 단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하는 자유조차 가로 막았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법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법에 예속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괴변에 불과하다. 오늘 목회자들은 이 말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가. 독재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법에 예속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는 한국 선교초기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들이 일본식민지를 정당화 해 주는데 악용되었고, 목회자들이 피묻은 손에 기도해 주었을 때도 악용됐다.
구체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장4절)고 법주의자들에게 물었다. 이 말은 법을 위해 법을 내세우는 법주의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사랑을 가로막는 법질서, 그것은 본래 법의 정신과는 대치된다. 그런데 오늘 일부 정치적인 목회자들은 교단의 헌법과 규칙 등을 내세워 동역자를 죽이고, 교회 내규를 만들어 교인들을 치리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 간에 사랑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목회자들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회의 법을 고치고, 교회 내규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소송사건에서 승리하면, 거기에 도취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이것을 하나님의 승리라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앞을 다투어 교회내규를 만들고 있는 것도, 목회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법정신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법주의자들은 어떤 행위나 그것이 법조문에 저촉되느냐 만을 묻는다. 이러한 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한 법정신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자신들이 만든 법과 제도에서 벗어나면 이단·사이비로 규정한다. 예수님의 법주의자들과 충돌했던 행위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사회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행위마저도 제약하고, 방해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예수님 법정신은 철저하게 인간해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예수님의 해방은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들이 제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성서의 법정신, 예수님의 법정신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서로 의지하며,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었다.
법을 시회적 약자를 옭아매는데 이용 말라
법주의자는 어디까지나 외향적이고, 형식주의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것은 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 법을 왜곡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교묘하게 옭아매는데 이용한다. 예수님은 그런 법주의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법집행이 형식논리에 지배될 때, 법은 자체의 정신에 침해를 받는다. 그리고 인권유린의 구실이 된다. 인권을 유린하는 법은 그 동기가 어떻든 용인돼서는 안된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죄인’으로 낙인찍고, 교회의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소외시켜 버린다. 한마디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행동하지 않는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가라고 말한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즉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들의 권리를 위해서 일하며,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무능한 왕권 아래서 평생 사람대접을 못 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족을 위해서 봉사한 결과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를 잃어버리고,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이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자리를 잘난 인간들이 빼앗아 버린 것이다. 백낙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에 있어서 전형적인 교회는 시골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이다”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반면 서구정통신앙에 물든 이광수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지적수준이 낮은 것을 비판했다. 이 두 사람의 견해는 오늘 한국교회의 양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법정신과 사역은 공생애 전체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법을 내세운 자들은 법으로만 예수님을 제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정치권력과 야합해서, 법이 법을 유린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처형했다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 관점은 예수님의 수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새 법전의 정신과 그 방향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병무 박사 역시 자신의 저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년, 한길사)에서 이같이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법질서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유린한다고 보고, 그것과 싸웠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