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보다 무서워하는 강대국 미국을 우상화하는 범죄
2025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 예수님을 교리·제도화시켜 그 뒤에 숨지 말라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하는 총회되길
9월 장로교총회가 시작됐다. 올 장로교총회는 종교적 관용을 통해 교단 간, 교회 간, 연합단체 간의 심화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화합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을 가져본다. 한 성경을 보고, 같은 찬송가를 부르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한국장로교회, 한국교회가 분열될 이유가 전혀 없다. 서로 교단간의 신앙과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미래로 나가야 한다. 하나 된 한국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신앙고백을 했다. 이 신앙고백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한마디로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성령 안에서 서로를 포용하고, 용성하며, 사랑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열수 있다. 새 내일로 나갈 수 있다. 특히 폭우와 산사태 등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총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장로교회가 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책무임에도, 성직자들은 지금까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외면한 채, 성령을 방매하며, 천상의 삶만을 강조했다. 그 결과 교회는 타락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세 이전의 영미교회와 마찬가지로 지상의 삶은 그리 중요하게 않는다. 그렇다보니 부정부패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기독교인이 늘 관련되어 있다는 보도는 교회가 정직함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종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교단간의 다툼과 분열 등 유럽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평신도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적 관용, 정치적 관용을 강하게 제기하고 나섰다. 중세시대의 계시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리화, 제도화되고, 그 주도세력들인 성직자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타락하기 시작했다.
영미신학을 그대로 받아드린 한국교회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켜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제도에서 벗어나면, 이단사이비로 규정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중세시대 평신도신학자 허버트를 비롯한 아담스미스 등 이신론자들은 전통적 신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는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세계의 운명은 신이 부여한 일정한 법칙을 부여한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인 신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 이신론자의 목표는 신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과 함께, 신과 세계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었다. 이신론자들은 계시종교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시종교를 감지하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종교·정치·경제영역까지 인간의 해방 선언해야
분열의 역사를 청산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되자
예수님을 교리화시켜 그 뒤에 숨지 말라
마음의 탐욕과 권력욕이 가득한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신론자의 주장대로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탐욕에 길들여진 나머지 정치적 관용과 결합된 종교적 관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분열을 고착화시킨다.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교회는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 서로 갈등하며, 분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며,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모두가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켜 목회자 대부분이 그 뒤에 숨어 버린 결과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분열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교회의 혼란은 사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의 생태계를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다. 초대교회의 정신을 상실한 한국교회는 성서가 교육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복음)과 예수님의 참평화를 잃어버렸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은 없다.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제도에서 벗어나면 이단·사이비로 규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제110회 장로교 총회 역시 몇 명의 목회자와 교회를 이단의 올무에 덫 씌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교회와 목회자, 교인 모두는 이단이다”(전용호 목사) 그래서 중세교회의 이신론자들은 자유주의 목표인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해방을 강하게 제기했다.
중세교회는 교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화형시키고, 죽이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이신론자들은 종교적 관용과 자유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해방에 목표를 둔 자유주의를 선언했다.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자유!자유!를 외치다가 자유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성경이 교육하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은 종교적, 정치적 틀 뿐만 아니라, 경제영역까지도 포괄하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
중세의 종교적 관용은 전통적인 교리종교와 성직자 중심의 종교에서 발생하는 교리적 갈등과 성직자들의 권력투쟁으로 생기는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신도신학자들이 이신론을 제기한 것이다. 사실 중세교회나, 현대교회나, 교리적인 갈등은 계시종교가 내세우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 주장에서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간, 교파간의 관용은 서로 다른 교리와 제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교파의 다양성, 이웃 교단·교회를 인정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는 것이다. 종교적 관용,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선교 150년 동안 분열과 갈등의 역사만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교회 사이, 교단 사이, 연합단체 사이에서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로 규정한 통일교 및 신천지의 정치개입으로 인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교단이나, 연합단체, 목회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특검으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같이 일들이 연일 발생하자 여당의원들의 입에서는 일제시대의 산물이며, 박정희 정권이 악용했던 “‘정교분리’법률을 위반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의원의 발언은 잘못된 발언인 것은 분명하다. 홉즈의 국가종교나, 존 로크의 ‘정교분리’는 종교(교회)를 보호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결과이다.
특히 모두가 종교적 이념에 갇혀 하나님의 참사랑, 예수님의 참평화를 잃어버렸다. 성령을 몰각했다. 성경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보니 오늘 한국교회 역시 국민들로부터 사이비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킨 결과이다, 자유주의의 목표인 개인의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 경제적 자유는 박탈됐다. 전쟁과 기아로 어려움을 겪는 민족,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 이민자 등 버림받은 자들의 아우성은 하늘에 사무친다.
부자교회 목사들은 자신들끼리 어울리며, 바벨탑을 쌓는다.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가난한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업신여긴다. 그렇다보니 부자교회 목회자들은 담임목사직을 세습 할 수밖에 없고, 세습은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권력자에게 빌어붙어 산다. 이들은 가진 자들의 눈물을 닦아 줄줄은 알아도, 살기 위해서 노동현장에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 이민자들을 위해서 기도 한번 해 주지를 않는다.
또한 이들은 권력자와 피묻은 손에 기도를 해주고서 “목사가 해야할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이런 목회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부자교인들은 근로자가 가져야 할 쉼의 시간을 ‘거룩한 예배’라는 이름으로 빼앗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가 가져야 할 쉼의 시간을 빼앗아 부를 축적하고, 수억원의 십일조를 드린 부자교인에게 축복기도를 해주고, 교인들에게 교훈으로 삼으라고 거침없이 설교한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 착도를 헌금의 액수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목회자와 교인들은 버림받은 자들의 눈물을 닥아 줄 여유가 없다. 성서는 분명하게 교육한다. 버림받은 자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망각했다. 성서에서 이탈한 영적지도자는 가찌 영적지도자이며,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분열주의자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라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잃어버린 자를 나 몰라라 하기 때문에 죄인이다.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가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이며, 사이비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비서트 후프트는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를 향해 경고한다.
“가난한 자를 위한 책임을 부정하는 교인이 있다면, 그들은 신앙의 이런저런 항목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이 이단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비서트 후프트의 말은 오늘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해석하며,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가 이단, 사이비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사실 한국교회는 각종 은사를 교인들의 입맛에 맞게 악용해 왔고, 바벨탑을 쌓으며, 맘몬을 위해 악용해 왔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이며, 고난의 십자가종교이다. 동시에 희망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다. 용서의 종교이며, 관용의 종교이다.
헌데 오늘날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라는 이름을 내세워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긴다. 그리고 강대국으로부터 뒤통수를 맞는다. 어느 목사는 노골적으로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복음보다 강대국 미국이 무섭다.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울살라 세계대회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가난한 형제를 돌보지 않는 것 역시 이단이며,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이탈한 자이다”고 선언했다.
교회 내에서 가진 자들이 카르텔을 만들면서, 갈수록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설자리가 없다. 성경은 바벨탑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노아의 홍수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이 두이야기는 흘러가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노아홍수가 일어난 이후 인간은 홍수가 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문화에 압도당했다. 바벨론의 문화에 비교하면, 유대의 문화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유대민족은 바벨론의 일월성신이 위대하게 보였다. 일월성신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일제36년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 학자, 종교지도자들도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며, 고난당한 민족을 몰각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한민족은 일본의 선진문화에 압도당했다.
“내 뒤에 강대국 미국이 있다”
한국교회와 일부 정치인, 학자들이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은 오늘도 일제근대화론을 말하며, “일본제국주의시대 대한국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조선의 해방은 연합군이 가져다가 준 선물이다”, “일제하에서 독립군은 없었다. 원자폭탄 2개가 해결해 주었다” 등 헛소리로 국민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국민들은 곤궁한 삶속에서도,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기독교의 한 인사는 독일로 건너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대한민국 국민도, 독일국민도 분노했다. 이 인사는, 국민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힘겹게 싸우는데, “아베님 잘못했습니다”라며, 아베 전 일본총리에게 사과까지 한 인물이다. 이들은 일제 36년 고난의 역사를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하듯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오늘도 일본문화에 세뇌되어 국민들을 분열과 갈등으로 이끈다. 이렇게 일본문화에 쉽게 동화되는데는 선교초기 영미선교사들이 한몫을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선교사들은 한국민, 아니 세계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게 했다. 오늘 유럽의 중세에 지어진 교회들은 거대한 술집, 아니면 박물관으로 변해가고 있다. 심지어 교회당이 이슬람 등 이웃종교에 팔려 나가고 있다.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유럽 국가들이 오늘날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유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오늘 한국교회도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일본의 선진문화를 한국인은 본을 받아야 한다”면서, “조선인은 돼지같이 더럽고, 개같이 사납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생각은 아서 브라운 목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시대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비폭력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민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을 폭도로 매도했다. 또 일본인의 우상 천왕을 섬기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러한 사실을 한국교회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제110회 장로교 가을총회는 우상 천왕을 섬긴 잘못, 강대국을 유토피아로 선전하기에 바빴던 잘못, 미국을 우상으로 섬긴 잘못을 회개하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우상 강대국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 무릎(?)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정부에 화해의 손을 내 밀었다. 여기에다 트럼프는 깡패같이 한국정부에 3500억불을 투자하라고 한다. 바이든 정부 때는 한국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위해 투자조건을 완화해 주었다. 미국의 노동자임금이 한국노동자에 비교해서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기업의 적자는 강 건너 불 보듯 뻔하다. 한국기업의 3500억불 미국투자는 노동자 30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계속해서 한국의 뒤통수를 때린다. 미국이 현대전기자동차를 수입하면서, 정부보조금을 못주겠다고 한다. 전기자동차 정부보조금을 둘러싸고 일본, 캐나다, 독일 등이 로비활동을 벌이는 사이, 대한민국 정부는 계엄과 탄핵과정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대자동차는 뒤통수를 맞고서야 미국의 악을 보았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만의 생존전략’을 세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나라의 고통이 이렇게 비참하다.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진리를 망각했다. 미국의 악에서 보았듯이 대한민국은 계엄과 탄핵정국서 국가생존전략이 없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과거만 들춰내기에 바쁘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 아니 대한민국은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청와대도, 정치인도, 학자도, 교회도 제정신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벨탑을 보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바벨로 알았다. 분명 기술문명의 발달은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바벨탑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종말의 심판은 예측불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종말은 비참하게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 세상, 이데올로기 등등은 멸망을 가증하게 한다. 권력자들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마가복음 13장 14-23절은 이들로(가증한 자) 말미암아 미래세대를 꺾어 버리겠다고 경고한다. 선을 가장한 것들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한국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정치권력에 빌어 붙어 있는 자들에 의해 교회는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종말에 그리스도인을 향해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맹목적인 열정, 맹목적인 추종은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통일교 및 신천지와 함께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통일교 및 신천지와 한국교회는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국민들은 묻고 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가 말하는 이단은 이단이라고 하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팔아먹는 사이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 것인데, 성경에서 이탈한 한국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인가에 대해 자문해야 한다. 오늘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선전이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일 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교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