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교수] 대한예수교 바리새회
교회 리더십 컨설턴트인 스콧 벨(Scott Ball)은 최근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진 리더의 특징’(Five warning signs of a narcissistic leader)을 5가지로 명시했다. 첫째, 공감 능력 부족이다. 교인보다는 자신의 필요와 동기에 더 집중한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능력이 결여된 자기애적 리더십이다. 둘째, 과도한 자기 중심성과 인정 욕구다. 자존감이 과대평가되어 특권 의식으로 끊임없이 교인들의 칭찬과 관심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셋째, 비판에 대한 민감성이다. 모든 형태의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비판에 민감하다. 건설적으로 수용하는 대신에 공격성, 분노로 반응한다. 넷째, 조종과 통제성이다. 상황을 조종하거나 타인의 행동과 의견을 통제한다. 자신의 우월성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인의 의견을 묵살하는 강압적 일반화가 강하다. 다섯째, 타인의 공로를 가로채는 성향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교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위험한 결정을 내리며 중직자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고대 인도에서 도(道)를 닦는 수행자들의 마지막 수행처는 왕궁이었다. 권력, 재물, 향락의 욕망과 음모가 도사리는 왕궁에서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진정한 수행자로 인정받았다. 사람은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나’와 ‘감추고 싶은 나’가 있다. 정신의학자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은 이 두 가지 대조된 인격을 각각 페르소나(persona·가면)와 그림자(shadow)라고 칭했다. 한마디로 나르시시즘에 빠진 지도자는 위선 덩어리다.
사람은 언제 페르소나를 벗고 진면목이 드러나는가? 첫째, 아무도 보지 않을 때다. 인격은 D. L. 무디의 표현대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이다. 예수는 인기 절정일 때 무리를 피하여 홀로 기도하셨다. 둘째, 힘과 권력이 있을 때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의 인격은 권력이 주어졌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라고 했다. 셋째, 분노할 때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본모습이다. 넷째, 사람과 헤어진 후다. 속칭 ‘뒤끝 작렬’이다. 뒤끝 작렬은 이별 그 자체보다 절차의 무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의 ‘양위 파동’을 통해 충신과 간신을 가려냈다. 마지막으로, 고난에 처할 때다. 시련과 고난은 사람 속을 완전 해부한다. 예수는 조롱과 멸시의 십자가를 지고가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용서하셨다. 고난 중에 무슨 말을 하는가. 고난 중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예수에게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동일했다.
사랑 없는 공의가 위선이다. 자아가 죽지 않은 정의는 재앙이다. 행동 없는 정의는 상대를 불의의 괴물로 만든다. 정의라는 이름과 ‘그들만의 리그’로 위선을 낳는다. 양심이라는 명분으로 개혁을 외치면서 자기들의 방식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위선자로 공격한다. 가짜 위선자를 만드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위선자다. 십자가 없는 정의는 악을 구축한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결사 집합체에 불과하다. 십자가 없는 교단 총회는 종교 장사며 자기 숭배자의 사이비 집단일 뿐이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특징이다.
마가복음 14장 6절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나온다. 잔치에 함께한 바리새인들은 “왜 허비하느냐”고 따진다. 예수는 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good work)을 하였느니라.” 미국 버밍엄 브룩힐즈 교회의 담임목사인 데이비드 플랫(David Platt)은 “오늘날 교회는 ‘좋은 일’을 하면서 본질을 잃어간다”(《래디컬 투게더》(최종훈 번역, 두란노서원, 2012))고 경고한다. 논점은 ‘좋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좋은 일’인가다.
영어에서는 ‘위선 없는 참 인격’을 ‘integrity’(정직, 고결, 성실, 도덕성)로 표현한다. 처음과 끝이 일관성이 있어야 순수함이다. 앞과 뒤가 동일해야 정직함이다. 말과 행동이 맞아야 진실성이다. 마음과 말이 같은 게 ‘integrity’다. 예수는 탄식하신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종교 개혁’은 세상이 아닌 교회 자체의 부패를 겨냥한 표적이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새로워져야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교회는 세상과 외부 세력보다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망한다. 교회는 기복주의, 물량주의, 인본주의, 성장 우선주의, 세속화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목회자는 돈과 권력에 취한 ‘황제 목회’를 통렬히 회개하고 다시 말씀과 기도, 성령의 원색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십자가와 천국 지향적 영성을 지향할 때 비로소 ‘바리새교’, ‘바리새인 총회’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 교회 위기의 본질은 성장의 정체가 아닌 정체성의 상실이다. 각 교단 총회의 계절에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다.
본지 논설위원, 한국교육기획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