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헌금 2억원 착복한 목사(?) 7천만원 돌려준 목사(?)

2025-11-26     기독교한국신문

평생 이단사이비에 몰두한 최삼경 목사는 수년 전 진용식 목사의 출판기념회 설교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1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로 갔는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목회자의 교주적인 아집의 죄는 교회와 민족의 죄가 됐다. 신학교, 연합기관, 담임목사의 세습을 꿰뚫어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져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할 목사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이비·교주화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지 오래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교회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교회마다 맘몬()의 냄새만 풍긴다. 예수님을 악용하는 사이비 목사의 입에서는 !! 악마의 금전소리만 외친다.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한마디로 교인들이 드린 헌금은 악마의 금전이 됐다.

예수님은 맘몬()을 철저하게 거부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탄이 나타나 시험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거부하셨다. 헌데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예수님보다 맘몬()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에서 이탈해 무한 질주하고 있다. 이제 성부, 성자, 성령은 타락한 목회자들의 복 방망이가 되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제도로 만들어 그 뒤에 숨기에 바쁘다. 이들이 바로 교주화된 목사이다. 하나님나라가 자신들의 집단만 들어가는 것처럼 교인들을 미혹한다. 이런 목회자들로부터 설교를 듣는 교인들 중,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따르겠다며, 기도하고 행동하는 교인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위해서 일하는 모든 교회가 가야할 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버려도, 부귀영화는 버릴 수 없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예속된 오늘날 한국교회가 아닌가. <교회개혁평신도행동연대>헌금을 가로채고도 평안한 목사/불편한 마음에 헌금을 돌려주는 목사란 제목의 글을 SNS에 올렸다. 대형교회 목사 중 한명인 김모 목사가 교인이 드린 목적헌금 2억원을 자신의 개인계좌에 넣었다는 내용을 공개하며, 비난했다.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2억원(외환은행 1억원짜리 수표 2)의 헌금을 김모 목사 개인계좌에 넣었다는 것을 안 교인은 8번에 걸쳐 반환을 요청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이 교인은 9번째로 고소장이 첨부된 내용증명을 김모 목사에게 보내기에 이르렀으며, 김모 목사는 결국 2억원의 헌금을 되돌려주었다고 고발했다. 김모 목사는 이런 형태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만들기도 했다(MBC PD수첩 방영).

문제는 이런 목사가 대접받는 한국교회가 되었다는데 안타깝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경제에 예속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데 참담하다. 김모 목사와 다르게 개척교회 6년차인 한 목사는 헌금 통에서 1천만원짜리 7장의 수표를 발견했다. 추적 끌에 헌금을 드린 주인공은 한달 전에 남편의 장례를 치른 여집사였다. 사망보헌금의 일부를 장례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교회헌금으로 드렸다. 여집사의 형편을 안 담임목사는 당황했다.

담임목사의 마음은 불편했다. 담임목사는 직분자들과 긴급회의를 갖고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이 여집사에게는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었다. 이들의 삶 역시 곤궁했다. 교회는 이 남매에게 주는 장학금이라며 돌려주었다. 7천만원의 헌금은 김모 목사 비자금 수백억원보다 크다. 이 목사의 행동은 스스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예속된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참 목회자이다. 7천만원의 헌금을 드린 교인 역시 한국교회에서 흔치 않은 교인다운 참 교인이다.

오늘 신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한국교회는 썩은 악취만 풍기고 있다. 그럼에도 쓰레기더미에서 꽃의 향기를 내는 참 목사, 참 교인이 있다는데, 아직까지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기쁜소식으로 들린다. 이것이 참 복음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