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길 목사] 찬송을 부르면서

2016-06-01     기독교한국신문

▲ 문 용 길 목사
나는 21C 찬송가 645장을 모두 연습하여 새벽에는 반주자나 반주기 없이 부르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묻는다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새벽에나 우리들의 순수한 육성 아카펠라로 부를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그 순수한(?) 목소리로 부르면 자기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이점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생활 하면서 네 번의 찬송가를 맞았다. 예수교 장로교(합동교단)여서 신편 찬송가(1935) 새찬송가, 통일 찬송가, 21C찬송가를 접하게 되었는데, 통일찬송가부터는 전곡을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도록 연습에 연습을 더하여 지금은 통일 찬송가에 이어 128곡이나 우리 곡의 찬송가가 들어있는 21C찬송가를 애지중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해서 지으셨는데 성경 못지않게 찬송가를 중시하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기본자세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천국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찬송을 부르게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지상에서 부르던 찬송을 들으신 주님이 생전에 부르던 그 찬송을 그곳에서 듣기를 원하셔서 부르게 되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부르는 이유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열심히 불러야 하고 주님께 경배, 감사,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찬송만큼 아름답고 영원한 우리의 신앙행위가 또 있을까 싶다. 말씀 기도 전도 헌금은 다 지상에서의 신앙생활로 마감을 한다. 그러나 찬송은 진짜 보좌의 어린양께 직접 들려드리는 가장 귀한 영광스러운 행위가 될 것이니, 그 날을 대비하여 최선을 다하는 찬양이 연습 겸 실제 들으시는 주님께 경배와 영광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 곡이 128곡이나 들어있어서 익히는데 매우 힘이 들었다. 멜로디를 철저히 익혀야 하겠기에 반복해서 부르는 연습은 쉽지가 않았다. 나이 탓에 기억이 최고의 위치에서 하향조정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우리가 이미 서양화되어서 인지 외국 찬송보다 우리 찬송을 부르기가 어렵다는 데 충격이었다. 이것 때문에 마음은 편치 않았으나, 계속되는 연습에 부르기가 역시 편해졌다. 그 동안 우리 것을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K-팝은 세계를 동요시키고 있는데 우리 찬송가도 이럴 때가 속히 올 것을 예상하고, 더 열심히 부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길이 한국 찬송가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21C 찬송가에서 181장과 402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님이 만든 노래 말에 나운영 장로님이 곡을 붙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격려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찬송임에 틀림없다. 402장은 이명직 목사님이 지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신앙생활을 한 목사님의 불의에 도전하는 의식과 우리의 반석이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승리로 마무리되는 내용이 좋아 자주 부르다 보니 나의 애창 찬송이 되었고 다른 분들에게까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두 분 다 성결교단의 아버지 같은 분들이어서 타 교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찬송가 한 장 한 장에 드리운 사연이 있어 새로운 감회를 불어넣어 우리의 신앙이 연결성과 정통성을 이어주기도 한다는 데는 거부감이 없다.

“…죽기까지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181장의 후렴내용이다. 또 402장 4절에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큰 승리를 주신 주께 영광 돌리세.” 얼마나 멋진 노래인가? 얼마나 힘이 들어있는 찬송인가!
찬송을 부를 때, 왜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는가 하는 질문에 충분하다는 답변이 부를 때마다 자답을 받는다.
우리의 영성은 기도할 때, 특히 찬송할 때 영성이 강하게 심령을 두드리는 체험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때 부르는 우리들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시선과의 마주치는, 마치 하이파이브처럼 딱 부딪는 체험이 나타나야 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복음성가 작곡자인 주숙일 님은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의 찬송을 이렇게 노래한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이룬다오

빌립보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
오늘도 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색환경 속에서 입만 열면 광활한 대지를 움츠러들 게 하는 찬미가
울려 퍼질 것만 같은데 정작 우리가 입을 닫고 사니 천지가 진동하도록 울릴 때는 언제일까?
내 입술은 닫힌 채로 점점 잊어가고 있으니 우린 언제나 삼천리금수강산은 요동치게 될까?

한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