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길 목사] 주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2016-06-22 기독교한국신문
왜 암과 치명적인 질병에 대해서 절망하는가? 바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죽는 경우 말고는 예시된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는 것은 질병이 틀림이 없다. 노인병원 암병동 중환자실 이 말들이 우리를 암울하게 하는 이유는 죽음에 더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죽음이 영향을 준 데는 부모님의 죽음 말고는 형제들의 죽음이다. 지금으로는 겨우 72세 사시고 자신의 존재를 멀리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겼으니 얼마나 당황스런 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두 분 다 그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나도 그 나이에 부름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이 72세의 나이에 날마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에서 여유와 안정을 갖게 된 것은 생각을 바꾸는데 있었다.
나의 가족 혈육이 기다리고 있는 나라, 그 천국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이뤄질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주님과 가족 형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나를 평안으로 인도하였다.
주님도 말씀하시길 주저하신 아름다운, 도저히 상상으로도 그릴 수없는 땅, 그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그분이 다스리시는 천국에서 부모님과 앞서 가신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의 전환은 내 생각의 혁명이어서 이 반전으로 기다리는, 형제들이 기다리는 나라의 새로운 개념은 나를 평안의 항구에 이르게 하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외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누가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내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그 나라를 완성하시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 계신 나라,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형제들이 있는 나라, 바로 이 믿음과 소망이 나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냈도다.”
영원한 이별 같아 영결식으로 치르는 장례식은 우리에게 슬픔과 절망이라는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이상의 두려움으로 우리를 감싸는데, 나를 아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는 그 나라의 환상은 현실 이상의 확신을 나에게 주고 있다.
죽음은 칼 같아서 정과 사랑과 혈육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에 예리하게 자른다.
죽음은 무자비하여 부모 자식과의 관계도 부부사이도 털끝만큼도 후회함 없이 가른다.
죽음은 거대한 산맥과 같아서 죽음 이후의 미래를 바라볼 수 없이 앞을 가리어 버린다.
죽음은 인생을 시샘하여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엿보다가 표범같이 달려드는 적이다.
죽음은 살아있을 때 큰소리치는 것을 관망하나 허약한 약점에는 관용을 포기한다.
죽음은 자신을 동반자로 여기고 겸허한 자세를 보일 때 숨겨진 지혜의 보고를 열어준다.
죽음은 무엇일까?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인생을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안고 갈 영원한 과제이기에 주님은 해결을 위해 이 과제를 십자가로 풀어주신 위대하신 해결자이시며 영원한 구원자이시다.
누가 감히 이를 두고 왈가왈부 할 수 있으랴! 이 땅에 오셨고 죽음 앞에 세 번 우셨고, 놀랍게도 주님의 눈물은 모두 죽음과 관계가 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요11:35) 주님 자신의 죽음으로(히5:7)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 곧 성 예루살렘의 죽음 앞에서 우신 사건(눅19:41)에서 인간이신 예수님께 죽음이 주는 절망감은 우리보다 더했으리라는 예상을 해 본다.
그러나 주님의 결단이 이 숙제를 푸셨고 그 방법을 깨우치셨으니, 하늘 아래 그 누가 진정 우리의 메시야가 되실까? only JESUS!!! 오직 예수님 밖에 누가 있으랴!! 이를 알게 하신 성령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예수님은 숙제 죽음의 해결을 위한 답을 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믿나이다. 이 고백을 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음을 깨우치신 성령님께 무한한 영광을 감사를 바칩니다. 할렐루야 아멘!”
오늘도 이 고백이 나를 주님의 날개 아래 품으시는 위로와 기쁨과 평안으로 인도하신다.
한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