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길 목사] 주도권(主導權)싸움

2016-07-14     기독교한국신문
▲ 문 용 길 목사

가만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주도권 싸움터가 아닐까 싶다.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사회면 사회, 심지어 종교계까지 주도권싸움으로 쌍방의 대립이 심각하다.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혼인에서부터 양가의 주도권을 놓고 심각한 대립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황혼이혼이라는 경우도 주도권 싸움에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하여 그 심각성이 갈수록 깊어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누가 이렇게 말할 때가 아니다. 이 세상은 그런 현장이 아니다 라고 누가 항의한다면 무슨 말로 대답할까 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싸움의 심각성이 크다, 라고 말하는 것이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

성별에서 오는 주도권싸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이 경쟁과 싸움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렇게 살 일은 아닌데, 여기에 좋은 본보기가 있다. 남의 등을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우는 식물들의 예가 좋은 사례가 될듯하다. 물론 공생의 삶을 사는 곤충과 동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생은 생존전략이지만, 예를 들면 능소화의 경우, 그 예는 그 차원을 넘는 듯하다. 요즈음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본격적인 여름의 계절이 왔음을 알게 하는데, 이때 시인 백승훈님의 능소화를 들어보면 삶의 방향도 수정이 될 것 같다.

능 소 화= 초록 그늘마저 시들해지는 / 염천의 하늘 아래/ 강대나무 타고 올라 주황색 꽃등 켠/ 능소화 홀로 눈부십니다/ 산다는 것은 / 서로에게 기대어 인연을 맺고 / 누군가를 꽃 피우는 일// 죽은 나무가 선선히 몸을 내주어/ 저리 눈부시게 능소화 꽃을 피운 것을 보며/ 당신을 꽃피게 할 수만 있다면 / 기꺼이 나를 내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꽃으로 피면 / 나는 더 향기로울 수 있으니까요

주도권 싸움은 에서와 야곱이 기원이 아닐까? 어미 뱃속에서부터 서로 먼저 나오려고 몸부림치며 경쟁을 벌인 것을 생각하면 타락한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타락상은 주도권 싸움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에서와 야곱이 어미 뱃속에서 그렇게 했다면 더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주님은 우릴 세워주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가난하게 되기도 십자가위에서 죽음도 당하셨는데 우리 세우시려고…….
터와 기둥이 없으면 지붕은 세워질리 만무하겠지만 사람들은 공중누각을 지으려고 혈안이 된 것을 보면, 몇 조금이나 버틸까 염려하며 안타까워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가? 주도권싸움이 더 심한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직분자들이 은근히 견제하며 은밀히 다투다 본색이 들통이 나면 완전한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그럴 바엔 아예 국회로 가시지 그랬어요? 이렇게 인사하고픈 경우도 허다하다.

주님과의 은밀하고 깊은 내면의 관계가 멀어지고 끊어지면서 나타난 현실이리니 생각하다가도 교회의 권위와 체통,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에 주님은 어떠하실까 하는 안타까운 상상 속에서 나의 생각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그려본다. “나 저런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은 것 맞니?”

우리는 본질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매우 염려스럽다. 우리가 본질을 무시하면 그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청천벽력의 음성을 듣게 될 터인데, 오늘도 내 생각과 열망에 붙잡혀 주도권싸움에 말려든다면 교회 권위는 한없는 나락(奈落)의 길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싶어 불안감마저 자리하고 있다.

이제 각 교단마다 가을 총회에서 임원을 뽑는 선거가 치열할 것인데, 어느 누구 하나님 나라 의를 위하여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는 일을 위하여 이 한 목숨 걸고 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섰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이번에는 나올까? 생각하며 주도권경쟁에서 소유주이신 주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우리의 태도가 두렵기만 하다.

한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