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사회에서도 교회를 부정적인 종교집단으로 보려는 시각이 높다. 특히 지식이나,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부정적인 시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지난 선교초기부터 일본제국주의시대, 해방, 6.25전쟁 이후 보리고개, 70년대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국민들에게는 교회가 가난하
예언자 요나는 이방 도성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선민인 요나는 천하게 여겨온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요나는 욥바에 가서 다르싯으로 가는 배를 탔다. 가는 도중 큰 태풍을 만났다. 배는 파선의 직전에 놓였다. 승객들은 배에 죄를
예언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아합 왕과 맞선 엘리야. 아합 왕의 왕후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고 바알 숭배를 확산시켰다. 바알 신은 전투를 잘하는 남성 신일뿐만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농경 신이었다. 바알문화는 북쪽 농경민들에게 쉽게 확산됐다. 아합 왕은 이세벨을 왕후로 맞이하면서, 왕권도 견고해졌다. 이세벨은 야훼 하나님께 도전하며, 예언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 왔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에게 어려움이 닥쳐을 때마다 기도했던 신앙선배들의 뒤를 잇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신앙선배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기도였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세
역사의 참된 갱신은 새 내일을 위한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약속하는 백성이 잇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꿈, 진지한 계약의 백성이 없으면 이상적인 사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대할 수 없다. 즉 눌린 무리들이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새로운 하나님나라를 갈망하고 일구는 사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지난 이야기를 더 깊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했다. “어머니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이야기를 거절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부모의 말을 거절하는 사람을 불효자라고 한다. 그리고 부모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효자라고 한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이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건, 윤리, 도덕이 어찌되었건 먼저 먹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 교단장 선거와 단체장 선거에서 돈이 뿌려지고, 금품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에게 성령이란 이름아래 몹쓸 짓도 서슴지 않는다. 예수님은 돌로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교인들은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성서는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행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이며, 공생애의 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네 번째 계약은 떠돌이들에게 달콤한 꿀과도 같았다. 애급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에게 있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만 아니라 가축이나 잡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
애급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금방 들어가지 못했다. 몇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맸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정의와 평화, 평등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하나님의 교육과정이다. 한마디로 오랫동안 히브리인을 괴롭혔던 바벨탑의 악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
지난 2천년 동안 역사적 예수님은 철저하게 묵살 당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리적 신앙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존적인 예수님의 역사성을 증언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로부터 보수적인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아 예수님을 초월적이고, 신적인 존재로서 생각해 왔다.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인은 고착화되어 버린 분단된 한반도, 불의한 정권과 결탁해서 성장하는
오늘 한국교회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사교집단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목회자 역시 부자교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에게만 축복기도를 해 준다. 그만큼 교회의 문턱이 높아졌다는 애기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업이야기와 부자된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분명 반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삶에 대한 파악으로 직결된다. 삶에는 연습이 없다. 그렇듯이 역사도 반복되지 않는다. 언제나 1회적 사건으로 매듭지어진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 갈 수 밖에 없다. 역사적인 사건은 언제나 유일회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특수하다. 그 때에 주어진 일을 그 시점에서 어떻게 처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생명은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하고 귀하다. 성서는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중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몸에 털끝만큼의 상처를 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 세계의 그 어느 피조물보다도 소중하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
어머니는 민족구원의 표징이며, 평화와 눌린 자들의 표징이다. 하나님나라 구원의 표징이기도 하다. 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드보라와 에스더를 민족구원의 표징으로 삼고 있다. 중 3소절에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님, 한 분 성령”이란 고백이 있다. 이 고백은 교회의 분열,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마 7:7-8)예수는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기도하라’고 직접 명령 하셨다. 이 명령은 기도의 위력을 설명하고 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있다. 1982년 마이클 패이건이라는 사나이는 버킹검 궁전 엘리자베스 침
오늘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타오르는 수백만 개의 촛불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장에서 국민들의 손에 들린 100만개의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촛불이 거리로 나왔는가(?) 세상이 많은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밝히는 복음의 불빛이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리더십을 상실하고 정의와 양심이 곤두박질
2016년은 삼류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해 독사의 새끼들에 대해 국민의 생각과 마음을 촛불이란 매개체로 결집력을 보여준 해이다. 국민들의 의식을 깨운 현 정부의 실정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역사 소설을 쓰고 역사드라마를 만드는 작가나 감독 PD들은 좋은 소재가 있어서 먼 미래에는 소재빈곤 이란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런 웃고픈 현실이 하루아침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제사장 사두개인들과 지식인 바리새인들과 지도자 장로들이 결탁하였다. 그 삼류정치는 거짓 증언과 함께 빌라도의 약점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의 큰 오점인 인류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사건을 연출한다. 그 당시 총독인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면서 재판의 결
배움을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낮은 나라이다. 자신은 굶주려도 자식의 교육을 놓지 않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현재 평화롭고 성숙한 시민의식 속의 촛불시위의 배경이라 볼 수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나라가 없는 암울한 대한민국의 미래의 희망을 교육에다 둔 그의 정신처럼 배움이 힘이 된 나라가 대한민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