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마가 11장). 그것은 바벨문화에 길들여져 잎만 무성한 예루살렘을 향한 저주이다. 아니 ‘바벨문화’와 ‘맘몬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다.예수와 제자들의 일행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가 시장하시던 참에 멀리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갔다. 열매는 없고, 잎만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주렸을 때,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벗었을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자, 눌린 자, 멸시받는 자, 병든 자와 함께 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여기에는 도덕적인 조건이나, 종교적인 조건이 들지 아니한다. 예수는 어느 때, 어느 경우에나 항상 병든 자, 가난한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바벨문화를 만들어 갈 때 예언자들은, 고난을 통해서 바벨탑의 악령을 명확히 보고, 이를 집단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이에 대치되는 새 내일을 추구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예언자들은 왕권을 탐하는 자들의 반란과 살해, 그리고 바벨문화를 쌓기 위해서 타락하는 왕과 왕비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왕들에
한국교회가 성장을 하는 동안 크게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선교 초기부터 1919년까지 민족적, 개인적인 구원의 동기의 요인이다, 당시 한국의 민족적 주권과 사회적, 정치적 상황은 혼란된 상황이었다. 이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열강들의 이권다툼, 일본의 침략, 자본주의의 평창주의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이 때 급속한 교회성장의 물결이 처음 나타났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는 생명력도 없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다. 생명력도 없다. 바울은 성서에서 교회를 살아 움직여야 하는 생명력 있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활동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구실을
결실의 계절, 감사의 계절인 11월이면, 교회마다 1년을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1년을 계획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 계획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예산이다. 이 예산은 총 수입을 예상하고, 총지출을 가늠해 이리저리 짜 맞추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예산은 교회재정의 투명성을 담보해 낼 수 있어야 한다.교회재정의 투명성은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6-7세기 이전까지 세계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였으며, 이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로마의 박해를 받은 동안 교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국교로 공인된 후에도 국가를 대신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했다. 구빈원을 만들어 식량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왕의 뒤에는 여성이 있었다. 또한 폭정과 억압의 왕 뒤에도 여성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지파연합의 평등공동체에서,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엄격한 국가조직으로 뒤 바뀌면서 여성들의 위치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천하고 천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여성을 비롯한 일반인들은 차별과 압제, 억압의 틀에 갇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별과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성서의 ‘복음’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성서의 복음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서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설교 내용의 대부분을 사회, 경제, 윤리사상 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서의 복음성이 결
“젊은이여 네 이상의 돛을 저 하늘의 별에 걸어라. 그리고 두 다리로 땅 위에 굳게 서라”이 노래는 영국의 시인 셀러가 젊은이들을 향해 부른 노래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젊은이는 이상을 품고, 아름다운 꿈, 푸른 꿈, 미래의 꿈을 꾼다. 현실에 안주하지를 않는다. 현재보다 더 나은 삶, 지금 사는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한다. 젊은 청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생명을 추구한다. 특히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고 나눔의 종교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은 태고 적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고민해 왔다.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싶다. 물질문명의 요란
70년대 한국교회는 대도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부흥했다. 그것은 정통적인 부흥운동과 미국의 교회성장론,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의 경제정책이 맞물려 상승작용을 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철저하게 베어있었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의 성장 뒤에는 농어촌교회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있었
오늘 대한민국은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노사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양극화 현상은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망국병임에 틀림없다. 이제 양극화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병리현상이다. 정치권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 논쟁 속에서 소모적인 다툼을 계속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괴리감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
지난주 에 ‘할머니 미안해’이란 제목의 컬럼이 실렸다. 필자는 황호관 목사님이었다. 황 목사님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김혁의 저서인 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춘자 일행이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왔으며, 그들이 당한 고초를 적나라하게 적었다.가난한 조선의 딸들은 ‘방직공장 여공 모집’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힘겹게 아리랑 고개
한국 기독교인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나, 안펜젤러 선교사, 알렌 선교사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히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하며,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도왔던 미 감리교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1863-1949)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190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정부는 주한 미국 선교사들에게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1984년 이후 개신교인 1천만명이 교회를 떠났다는 통계가 있다. 28년동안 한국교회의 교인 1천만명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종교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교인이 되었고, 불교 등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교인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97년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불교, 천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피존물이다. 때문에 거룩하고, 존엄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털끝 하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최근 어느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독극물에 의한 집단 살해사건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되지를 안는다. 무엇보다도 같은 동네에 살고, 함께 생활하던 할머니가 가해자라니 여기에 동의 할 수가 없다. 경찰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생존
7월은 법의 달이다. 법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질서를 지키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법은 모든 국민에게 통용되고, 적용된다. 또한 법을 어기면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헌데 국민에 의해서 만들어진 범이 통하지 않는 곳이 한군데 있다. 바로 한국교회이다.때문에 한국교회에서 쉬지 않고
1984년 이후 개신교인 1천만명이 교회를 떠났다는 통계가 있다. 28년동안 한국교회의 교인 1천만명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종교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교인이 되었고, 불교 등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교인들이 계속해서 줄고 있다는 것이며, 다수의 지식인들과 의식을 가진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