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지역을 지나시다가 열 명의 한센 병 환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눅17:11-19)고 하셨습니다. 열 명이 모두 다 나음을 받았지만 낫게 해준 주님께 와서 엎드려 경배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사회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낫게 해준 주님께 찾아와서 감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기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는데 우리가 만약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주님에게 가까이 간 사람일수록 의롭고 선하고 정직합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선 먼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가까이 간 사람일수록 사단을 닮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온전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친히 원수를 갚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성경에서는 몇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는 길을 보게 하고 삶의 목표를 알게 합니다. 자신의 현 주소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암 가운데 사는 것은 참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셨습니다. 여기서의 빛은 태양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빛이 없으면 자신이 가는 길과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행들이 우리를 화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안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우리의 길을 여호와 앞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신뢰하고 그의 성실하심으로 식물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짐과 불평, 어려움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가 이루시고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실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차량을 운행하다 보면 신호를 받기 위해 기다라고 있노라면 뒤의 차량이 경적을 울려 대는 일을 심심찮게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보행신호 등에 눈치것 가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느냐는 뜻이리라, 그러나 안전운행을 위해 신호체계를 정해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창밖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추월하는 사람들로 인해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순간 빠른 속도로 추월하는 차량과 하마터면 추돌할 뻔한 경험들은 많다. 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있으며 욕설, 위협 등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못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흔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고 했으니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 핍박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우리를 못살게 구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원수를 갚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받았던 핍박과 어려움을, 나이가 많아서도 지워버리지 못하고 마음
인생들의 기본적인 욕구인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소망은 이 땅에 국한 된 소망입니다. 수명이 다해 죽으면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소망은 끝이 납니다. 장례식장에서 흔히들 “고인이 편안한 곳에 가서 쉬기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 소망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으면 묘를 양지바른 곳, 전망 좋은 곳에 써 달라고 유언하지만, 그의 시체가 따뜻한 곳에 묻혀 먼 들판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비유하여 말씀하셨듯이, 그가 구원받지 않았다면 불꽃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해서 그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또 어떤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고 오래 머물면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처음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도들이 얼마나 사도 바울을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받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 슬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순수하고 주님을 사랑하던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는 성적 범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사건과 광야 사십년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들의 삶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점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들이 사라져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염려하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기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목숨을 내어주기를 힘듭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장기를 줄 수 있겠지만 자식이나 동기간들은 조금 다릅니다. 손가락을 문에 조금 찧어도 아픈데 주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다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갚아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믿기 전의 방탕한 삶을 계속 살아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마라톤 경기를 보면 수백 명이 출발하지만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고대의 마라톤 선수들은 경주를 할 때 옷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경주를 하는데 방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이유로 주님에게서 멀어져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또 그들 중에 더러는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딤후4장 10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으로 간 데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선교지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골 4:14) 그는 아시아의 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바울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갇혔을 때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나 고난을 피해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과 교
사도 바울은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험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는 체험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험이 많으면 구원을 체험하고 고난이 많으면 열매가 많으며, 어려움이 많으면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것, 그것을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18)”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이 악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을 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환경이나 물질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이고,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다수의 시편을 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많은 환란을 겪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자신을 버리셨느냐, 하나님은 왜 주무시냐는 등 갈급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본문의 시는 자신이 여호와로 소유를 삼았다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날로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쁨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삶도 오늘날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세상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동하여 살인과 음란과 퇴패와 패륜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 수준들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러한 악한 행위들을 볼 때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
사람들은 불평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던 중, 길이 좋지 않자 속이 상했고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거기서부터 불평이 시작되어 음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열흘이나 보름 안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기 때문에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탐지하기 위해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덩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 안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가 나타나는데 ‘사랑’과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특별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소유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상속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있고,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재산
교회가 한번 세워지고 나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살아있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위험 가운데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임할 때 건강한 교회가 유지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를 기록한 이유는 에베소 교회에 위험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3:15)” 주님은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오지 못한 것은 하나는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과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은 싫어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