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보이지 않으나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와의 교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고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중세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치를 창조하신 이후, 그의 섭리에 따라 세계는 시게바늘처럼 돌아간다고 했다. 한마디로 인류의 모든 것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로잡았다고 해서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구조가 인간의 소유욕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구조가 바로 잡히지 않고서는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특히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킨 오늘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고, 자기중심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서 상호간의 역사적 차이를 존중하고 보완하는 선교전략을 세우는데 실패했다. 성서의 중심메시지는 인간 해방을 이룩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데 있다. 구약성서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이원적인 사상은 영지주의 전통에
민족 해방 73년, 광복 73년, 분단 73년. 한국전쟁 68년이 되었다. 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어머니, 생명의 어머니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도하며, 나라의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위해서 행동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의 평화, 남북한 민족의 화해의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희망이 보인다. 남북한 민족은
한국에서 기독교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우리의 우방인 미국도 아니며, 유럽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분단된 채, 서로 대결구도에 있는 한반도이다. 그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오염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작 할 때, 한국인들은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문명을 혼돈했다. 한마디로 서구문명이 곧 그리스도교로 생각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는 만인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만인의 종이다”고 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자유롭다는 것이며, 누구에 대해서도 섬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되었던 구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반도에 평화의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오늘의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간절하다. 그 기도는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민족의 화해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족이 분단된 이후 남북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 기도를 드려왔고, 기도하고 있다. 그 기도가 오늘에 현재의 상황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 감사하다.
요즘 대한민국 국민들은 희망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적대적의 관계에 있던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의 무드가 조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온 필자는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정상의 만남, 북미 정상의 만남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낭비와 부패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남성들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되고 조정되는 세계에서/여성들이 억압되고 있는 세계에서/이 땅의 드보라여, 일어날지어다! 깰지어다! 노래할지어다!/이 땅의 드보라, 당신들이 일어서기까지/이 땅의 어머니, 당신들이 일어서기까지/이 땅은 죽어 있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중략)…이 민족의 위기에서 이
잠언 29장18절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젊은이여 네 이상의 돛을 저하늘의 별에 걸어라. 그리고 두 다리로 땅 위에 굳게 서라”고 노래했다. 이상을 품지 않은 젊은이는 없다. 꿈을 꾸지 않는 젊은이도 없다. 젊은이는 누구나 미래를 향한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푸른 꿈을 꾼다. 지금 사는 세상보다도 더 나은 세상을 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을 주시면서,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다.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향한 약속의 대화이다. 오늘 기도하는 사람들은 조용하고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해 풀리지 않는 제목을 놓고 기도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며, 이웃과 단절된 사람이다. 오늘 그리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때문에 기도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아우성치며, 울부짖는 자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애급에서의 노예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이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울부짖는 아이에게 사랑을 더 주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아우성치는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이 기도는 죽은 후
오늘 한국교회는 성과주의, 성장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아니 성과주의와 성공주의를 넘어 이를 우상화시켰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의 물질주의와 성과주의는 아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은 물질주의에 빠져 사탄의 꼬임에 넘어갔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영생불멸하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
어느 날 친구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글 하나가 날아왔다. 글의 제목을 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나 역시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한없이 쏱아졌다. 이야기의 즐거리는 이렇다. 일본의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오늘 여성들의 ‘미투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다. 미투운동은 분명 여성운동이며, 여성 인권운동이라는 점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이투운동은 여성 자기해방운동이다. 이러한 기독교 여성운동은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사회와 남성중심의 역사기록으로 인해 은폐되어 왔었다. 당시 기독교여성들은 교육, 사회, 문화, 계몽문동을
다음 달은 장애인의 달이다. 또 부활의 계절이며, 생명의 계절이다. 그래서 금년도 부활의 계절에는 장애인에게 희망을 주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장애인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정책이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장애인을 위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중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인이 얼마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 아니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두가 개인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이로 인해 민족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외교적 등 어디 하나 성한 곳이
평창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경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의 막혔던 육로, 바닷길, 하늘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소련 등 주변국들의 적대적 발언과 경제보복, 전쟁을 위한 긴장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늘 행동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가지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버릴 수 없다. 히브리서가 증언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믿음으로 민족을 구하는 등 크게 일을 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헌금 액수가 믿음의 척도가 아니다 기도가 믿음의 실상이며, 척도이다. 또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때문에 썩지 않는다. 생명과도 같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이며, 기도의 결과는 후손과 교회사에 기록되어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 신앙선배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결과이다.기도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곳을 넘게 한다.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한다.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