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겉으로 평화를 노래한다
신앙공동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집단이라는 것을 모두 고백하자
바벨과 맘몬의 호화로운 교회당에 하나님 가두고, 이웃 아픔 외면

 돈벌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구조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현장은 돈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제 고향도 가족도 없다. 돈 벌기 위해 도시로 몰려왔다. 교회 역시 돈에 환장해 있다.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돈’이 ‘신’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는 이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다.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과 지구를 살리기 위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뿌리 없는 떠돌이들의 윤리의 울타리를 헐어버린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신앙문제나, 예배나, 기도회나, 이웃을 돕기 위해서 모여도, 의식화 집단이 아닌가를 생각했던 때가 있다. 아니 반정부집단들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주목하기도 했다. 이래서 생긴 불신풍조는 국민들을 모래알처럼 흐트러놓았다. 이것이 무서운 병에 걸려 죽음으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면서 교회는 가식적인 평화를 노래하며, 겉을 포장한다. 이와 함께 잘못된 권력과 결탁해서 교회성장에 몰두하며, 2중대 노릇을 한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교회는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평화운동을 벌이는 교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진보교단의 민중교회 중심으로 일어났던 평화운동과 현장목회도 퇴색해 기존교회 별반 다른 것이 없다.

왜 한국교회와 국민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세계교회 역시 생태계의 위기와 전쟁으로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침묵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술과 권력과 자본이 야합해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반문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본능을 최대한 자극해서 인간사회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사회이다. 한마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로 줄달음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날지 불확실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분명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 아니 평화운동을 벌여야 하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모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며, 기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이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을 실천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기적은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떠돌이, 병신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눈먼 자를 뜨게 하셨다.

한마디로 사건을 통해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들이 사람대접을 받으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갈망했다. 잘못된 정권과 결탁해 성장한 한국교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는 부자가 된 나머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불의한 정권을 옹호하기에 바쁘다. 한국교회가 초심을 잃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쁜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영적으로 병든 교인들을 교회에 비끌어매두고 헌금을 거두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문제가 있지 않은가.
 
▲ 한국교회는 죽음으로 예수님이 벌이신 평화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초심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이같은 지적에 대해 반론도 없지 않다. 이미 돈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안에서 이를 부정할 교인과 목회자는 없다. 그것은 종로5가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연합회관을 보면 쉽게알 수 있다. 이 빌딩은 이미 정치꾼들이 모여들어 정치집단화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며, 한국교회 분열의 상징이 되고 있다. 또한 이 빌딩을 배회하는 일부 정치꾼 목사들은 한국교회의 이슈를 만들어 대형교회를 돌며, 기획서와 영수증 없는 헌금을 모금해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모금한 헌금에 대한 투명성을 담보해 낼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것이 만성화 되어가고 있다는데 문제이며, 여기에 목사들이 넘어간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이런 목사는 목사도 아니며, 바벨을 노래하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교회 역시 교회가 아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은 묻고 있다. 한국교회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위해서 있고, 보수와 진보로 갈라놓는 이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선교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생태계의 위기와 가공할 무기개발로 인류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상황에서, 예수님이 벌인 비폭력 평화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기피하는 교인과 목사는 악마들의 장난에 현혹되어 자기를 상실하게 하는 악의가 숨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홀로가 아니라 집단의 삶을 위하는데 있어야 한다. 너를 살리기 위해, 집단이 살기 위해 나의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좁지만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적어도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삶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에 주어진 선교의 참뜻이 아닌가.

선교의 의미는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보다도, 죽음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살게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를 잃어버린 잘못된 세계에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깨지고, 세계 곳곳에서 제1세계에서 만든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오히려 관념과 조직된 집단에 사로잡혀 전쟁을 부축이며, 종교 간의 갈등, 민족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보혁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갈등 유발로는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 이런 종교단체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적그리스도이다. 이러한 남북한이 대처하고, 민족의 감정이 극에 단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평화가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지 초점은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님의 사건은 죽음과 삶의 사건이다. 죽음에서 삶으로의 사건이다. 죽음을 경험 못하고는 삶으로의 길이 없다는 진실을 다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죽음이 없는 삶, 고통이 없는 편리와 즐거움만을 추구한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공동체는 죽음과 고통을 뛰어넘는 직접부활, 삶으로의 길이 없어 보인다. 교회는 고뇌와 죽음을 도외시하고 행복과 영광과 편리만을 계속 약속한다. 그리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영적구원. 회개, 영적각성 등을 외치며, 민족의 고난과 민족의 의식화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막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민족의 어머니이며, 길삼해서 가족들에게 옷을 입힌 기독여성, 농사해서 가족을 먹여 살린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에 의해서 민족의 아픔과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작게나마 증언해 왔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하는 악마의 세력에 맞선 피폭력 평화운동이었다. 폭력이 아닌 말로써, 죽음으로써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악마에 맞선 피폭력 평화운동
 
예수님의 죽음은 죽임당한 사건이다. 그 죽임은 어떻게, 왜, 누구에게 죽임을 가했는가를 묻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죽음에 참여하지를 못한다. 또한 삶의 메시지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둔 나머지, 세상은 참 희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평화의 노래 소리는 꾕과리소리로 변질되었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소리만 귀전을 울리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악마와 싸워 이겼다. 그 악마는 무엇인가. 오늘의 악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피안의 공중에 있지 않다. 역사의 현장, 삶이 이어지는 그 한가운데 있다.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악이다. 예수님이 싸운 무기는 창칼이 아닌 몸이었다. 그의 죽음, 죽임 당한 것이 바로 악마와의 싸움의 행위였다. 죽음으로 싸웠다. 죽음을 당하면서 악마를 제압했다. 이런 싸움에서 예수님은 승리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집단적 죽음이든, 개인적 죽음이든 희생이란 무기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 싸움만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희생을 통해서 죽어가는 지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인간은 이런 신념을 가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편리함과 즐거움을 갈망한다. 그렇다보니 지구 20번을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도, 화학물질에 의해 생태계가 위기를 맞고 있어도, 매년 수많은 산림들이 초토화되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신앙공동체이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사탄과 싸운 예수님의 뒤를 이은 새로운 신앙공체의 구체적인 과제이다. 한국교회의 신앙공동체는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보냄을 받고 세워진 집단이다.
한국교회의 신앙공동체는 우리주변에서 무엇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는지를 직시하면서 그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를 살리는 것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선교과제이다. 이 확신으로 이 땅 위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한 번에 풀수 없는 세계의 문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콜럼버스의 미국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은 특집서 이같은 평가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다”

이 말은 오늘 한국교회에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유럽의 자본주의 문명은 기독교의 선교 희망과 더불어 미 대륙을 향해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도 여기에 길들여져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예배 모임만 있으면 돈!돈!돈! 돈의 돈!돈!을 외치며,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 믿음의 척도도 헌금의 액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구자, 떠돌이, 병든자 등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다. 예수님은 한꺼번에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만나는 사건, 당하는 일에서 단순히 측은해서 도운 것이 아니다. 그 행위가 바로 악마를 추방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운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와 직장, 정치현장, 생활현장 극히 작은 구석이라도 죽어가는, 그래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상대할 때 그것은 큰 손, 큰 구조의 일부분이 부각된 것임을 깨닫고, 그것에 참여해 싸울 때 악마와 싸우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집단이라는 것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나라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썩은 살을 도려내면 새살이 나오고, 물은 아무리 막아도 아래로 흔른다는 진리를 잊지 말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무기경쟁으로 만들어지는 평화(팍스)가 아닌, 예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정의로운 평화(샬롬)을 노래하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부여한 평화(샬롬)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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