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피를 가장 많이 흘린 종교

종교의 본질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평화이며, 사랑이다. 기독교는 더욱 그렇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유교에서 말하는 ‘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그것을 확대해 보면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평화’이다.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성격화 했다.

그런데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오늘의 상황에서나, 과거나 평화적 종교로서 충실을 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는 내용적으로 사랑과 평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종교이다. 그 책임은 서구인들에게 있다. 기독교가 뒷받침 하지를 않았던들 이렇게 세계역사가 피로 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제일 많이 피를 흘렸고,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가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전쟁을 유발시킨 이유 중 하나는 집단의식 때문이다. 기독교는 국가의식이나, 계급을 초월했다는 면에서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집단의식에 너무 고취돼 타종교에 대해서 아주 배타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는 ‘우리 집단’, ‘내 것’, ‘우리’를 내세운다. 거기에는 기독교가 이스라엘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성을 생각하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웃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 간의 갈등과 다툼이 자주 일어난다. 전쟁까지도 불사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민족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다. 이들이 호전적인 민족이 된 것은 선민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강한 집단의식이 되어서 전쟁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약해서 침공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 호전적으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전쟁’이다. 이 이름아래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전쟁을 유발시키는데 중심에 있었던 제1세계를 비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집단의식을 확대 발전시켰다. 민족의 영역은 아니지만 새로 된 기독교의 조직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했다. 우리는 선택받은 집단이다. 이것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서 ‘나’가 아닌 것은 나쁘다. ‘나’ 아니면 ‘원수’이다. ‘관념’이 되어 버렸다. 코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한 이래, 기독교는 국가권력과 야합했다. 집단의식이 정치구조적인 것이 되어 전쟁과 피를 흘리는 요인이 된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는 세계화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관념화’의 역할이다. 종교는 관념이 매개가 되어 나 자신을 관념화 해 버린다. 종교가 관념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어떤 관념을 뒤받침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선’이나, ‘악’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 ‘선’과 ‘악’을 규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과 다르면 악으로 규정해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선’과 ‘악’은 사실과 유리된 또 하나의 유령이 되어 현실을 규정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싸움과 다툼,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런 경우 적대자는 사람이 아니다. 뿔 달린 악마이다. 사람들에게 사랑이니, 인이니, 자비를 말해도 이해하지를 못한다. 이런 관념화는 언제나 종교가 앞장서서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나 종교를 내세워 적대의식을 고취시킨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런 위협을 당해 왔다. 오늘 회교국가에서 일어나는 전쟁, 제1세계의 지원 아래 벌어지고 있는 전쟁 등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의 관념화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때문에 이웃종교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며, 이것이 심하면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킨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보더라도, 항상 나와 다른 것을 적대자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종교전쟁은 이해도, 대화도 없다. 어느 한쪽이 망해야 끝난다. 여호와의 전쟁(거룩한 전쟁)이 그러 했다.

독일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다. 독일민족 전체가 협조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관념이 한 일이라는 것이다. 서구에는 관념화된 반유대사상이 유럽 사람들의 내면에 깊게 깔려 있었다. 히틀러는 이 반유대사상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유럽사람 누구도 유대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구인 머리에는 반유대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관념’(사상)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다. 놀랍게도 유대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뒷받침한 것은 기독교였다는 사실이다. 즉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많은 유대사람을 학살한 독일인이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평화를 외치는 국민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인들은 이미 형성된 관념으로 인하여 유대인이 사람으로 안보였을 것이다. 악마로 보였다. 단순한 물건으로 보였다. 이런 것은 모두 관념과 집단의식이 만들어 낸 악마성이다. 관념이 전략적, 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종교는 자기모습을 잃어버리고, 악마화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종교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해 왔으며, 국가권력과 밀착되어 많은 혜택을 누려 왔다. 홉즈는 “종교는 국가의 지배아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존 로크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교를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종교 평화를 강조

종교가 무엇을 위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그 종교는 타락한 종교이다. 종교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종교는 관념으로 전락하고, 집단의식이 형성된다. 무엇을 위하는 종교인 경우, 잘못된 권력이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종교는 무엇을 위하는 도구가 아니다. 종교는 어떤 것을 위해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써먹는다고 할 때는 틀림없이 종교를 이미 있는 것과 일치시켜 버린다. 그렇게 되면 종교를 대신해 버리게 된다. 이는 종교의 본질을 후퇴하게 만들고,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전면에 나서게 한다.

종교정치세력화를 내세우고 만들어진 정당을 보라. 처음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정당을 세운 이후, 정치적 현실에 흡수된다. 그럴 때 그 종교는 완전히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집단의식에 사로잡힌다. 인도의 힌두이즘은 만인평등에 거점을 두었다. 하지만 카스트제도 같은 것을 아주 고정화해버리고, 더 흔들 수 없는 것이 되게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사회적이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미 없어져야 했는데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힌두이즘이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교도, 유대교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교가 믿던 하나님은 손에 들어 올 수 있는 신이거나, 보이는 신이 아니다. 어떤 것에 정착된 신도 아니다. 신앙이 율법화되고, 성전중심의 종교가 된 이후부터 유대교의 신은, 그 율법과 성전 안에 고정된 신이 되었다. 성전과 율법을 절대화 시켜 버린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과 싸워 출발했다. 그러나 기독교도 교리와 제도를 만들어 그것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범했다. 성전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렸다. 그것이 관념화되었고, 그것이 국제세력과 야합, 똑같은 악마성을 드러냈다. 서구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유럽이 세계를 점령 할 때, 철저하게 그것이 이용됐다.

스페인의 가톨릭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백인을 우월하게 만들었고, 흑인들은 백인을 섬기도록 교리화 했다. 스페인의 한 신부는 잘못된 교리화와 싸웠다. 그는 가톨릭 법정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싸움은 나중에 흑인신학, 해방신학을 태동시키는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했다.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는 이씨 조선의 핍박을 받으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다.

모든 종교는 분명하게 평화를 내세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영미선교는 처음 군대가 들어가고, 목사가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사가 들어갔다. 완전히 선교사도 점령군으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스페인 카톨릭이 남미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미국에 들어간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남미의 선교사들은 사람을 죽이면서 점령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뉴질랜드에 들어간 선교사는 달랐다. 토속민들과 상생하며, 선교한 결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를 거쳐 유럽에 간 기독교는 자신의 문화에 맞게 안착시켰다. 하지만 유럽인에 의해서 남미로 간 기독교는, 그 나라를 지배하면서 유럽식세계화를 시작했다. 17세기 이후부터는 영국을 선두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여타의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유럽의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한마디로 토속민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구의 팽창주의는 결국 세계의 질서를 깨고, 평화에 위협을 가했다. 우리나라도 영미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의 합작으로 일제 36년이라는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났다. 피선교지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킨 선교는 실패한 선교이다. 현실을 외면한 선교이다.

참평화운동 방해하는 교리로 전락

과거에는 전쟁만 없으면, 총을 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이것을 평화라고 했다. 그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목격해 왔다. 양성화된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전쟁이 더 치열하다. 이것을 냉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전쟁준비를 위한 무기개발에 경쟁을 벌였다. 지금 세계의 핵무기 중 대부분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 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인류를 20번 전멸하고 남는다.

과거의 평화는 안일주의와 같은 것이다. 네 것, 내 것의 한계를 알고 서로 협상하며 살면 될 것 아니냐.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싸움하지 말고 사는 것이 평화로 알았다. 이런 사고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성서의 평화는 기존질서의 안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평화운동은 매우 능동적인 것이다.

사랑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개방해서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여는 것이다. 이것은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이것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양성화된 것이나, 음성적인 전쟁 모두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일보한 평화의 의미를 내놓았다. 예수님은 “원수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다. 참평화운동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평화를 방해하는 근원적인 것을 공격해야 한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종교의 집단성과 관념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는 기독교를 교리화시킴으로서 본질이 흐려졌다. 예수님은 교리를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은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성이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악에 맞서 선한싸움을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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