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을 증언해야

부활주일을 맞았지만 죽임 당한 자들의 피맺힌 한의 소리가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 가진자에 의해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라는데 주목된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명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가 들끓고 있다.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을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는 3년이 지났지만 미완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배안에는 9명의 생명이 있다. 세월호의 처참한 모습은 수면위로 올라와 목포 신항에 안착됐지만 풀어야 할 문제는 많다. 또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수모와 치욕과 고통을 당한 위안부들의 ‘한의 눈물’은 아직까지 마르지 않고 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 인종청소로 인해 피조물들의 생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전쟁과 기아를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다가 한 번에 수백명씩 수장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매년 수천명의 아이들이 기아에 노출돼 영양실조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 안에서도, 부모에 의해 어린생명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웃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 목사에 의해 아이가, 아니 부인이 죽임을 당했다.

스스럼없이 평화를 강조하며, 생명을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아침에 무엇을 기도할까(?) 자신에게 묻고,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 아니 ‘피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헌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국민들은 이 땅의 평화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데, 관념에 사로잡혀 권력자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다시 매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활의 아침에 깨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묻고 있다.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시다.

부활의 아침에 대한민국을 둘러싼 전쟁위기설이 미디어를 통해 안방에 매일 전달된다. 북한 김정은은 계속해서 미사일 발사실험과 핵실험을 하면서, 미국과 일본, 남한을 향해 큰소리를 친다. 여기에 맞서 미국은 호주 인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항공모함 전단을 대한민국 쪽으로 이동시켰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다 일본은 패권주의를 부활시켰다. 이웃나라를 침략할 수 있도록 헌법도 고쳤으며, 군대도 창설했다. 또 많은 군인을 세계 분쟁국가와 전쟁 중인 나라에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신무기도 도입하고, 자체적으로 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우리정부와의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안건을 결정하는데 1분도 안 걸린다는데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다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대한민국과 중국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중국의 경제보복은 도를 넘었다. 이렇게 한반도를 둘러싸고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우리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당국 외교관을 불러 항의하는 일과 국민을 안심시키는 일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구한말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땅의 평화와 정의, 자유 위해 행동하자
죽임 당한자의 ‘한의 소리’ 듣자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죽임 당한자의 ‘한의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가 드리는 부활절 예배 장소는 세월호 참사로 죽임을 당한 자를 향해 막말을 쏟아낸 장소이다. 이 장소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는 부활절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동위원회의 설명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를 않는다.

여기에 일부 목사들은 “세월호 7시간을 밝히면 죽은 아이들이 살아나냐”며, 공공의 예배장소에서 외친다. 또 어떤 목사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향해 “돈 벌려고 위안부에 지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정치 기도회 장소에서 말한다. 또한 한국교회 보수연합단체를 대표하는 단체는 3.1절 기념예배를 탄기국 2중대 기념행사로 가졌다. 여의도의 한 부자교회는 이 집회를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내 놓았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민심을 배반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수명을 다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면서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한다. 기념행사도 곳곳에서 준비했다. 이웃교단과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는다. 여기에다 여러 가지 행사를 빌미로 부자교회를 순회하며,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설교를 하는데 많은 돈을 내야 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병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예배 때마다 인류의 평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가 허공을 친다.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목사님들의 모습은 해도 너무한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서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식하고, 떠돌이, 과부, 창녀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또 인류의 평화운동을 벌이셨다.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인류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라! 이것이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 ‘피의 절규’를 듣는 것이다.


평화운동,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최소한 몸부림이다. 오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죽는 것이 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남북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국들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세계 민족이 모두 살기 위해서 문제를 무기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런 당연한 소리에는 아랑곳 하지를 않고, 강대국들은 무기판매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은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기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을 팔수 있는 대상이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떤 지원도 서슴지 않는다.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재정권 아래 있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실리를 추구하다가는 인류가 멸망될 것은 뻔하다. 많은 나라들이 이를 경험했으며, 경험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시리아 미사일공격은 이를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새 무기는 계속 개발되고, 낡은 무기는 쌓여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나.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큼 확실한 해결방법이 없다. 한번 전쟁에 소비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고통에 죽고 파괴되는 자는 제3세계인들이다. 6.25전쟁을 겪은 한민족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음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내 놓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를 누가 막고 나설 것인가.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평화를 노래해야 할 교회가 전쟁과 민족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동독과 서독이 하나 되는데 그 중심에 독일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종교 평화를 강조

모든 종교는 평화를 강조한다. 종교는 무엇을 위하는 도구가 아니다. 종교는 어떤 것을 위해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써먹는다고 할 때는 틀림없이 종교를 이미 있는 것과 일치시켜 버린다. 그렇게 되면 종교를 대신해 버리게 된다. 이는 종교의 본질을 후퇴하게 만들고,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전면에 나서게 한다. 종교정치세력화를 내세우고 만들어진 정당을 보라. 처음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정당을 세운 이후, 정치적 현실에 흡수된다. 그럴 때 그 종교는 완전히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집단의식에 사로잡힌다.

인도의 힌두이즘은 만인평등에 거점을 두었다. 하지만 카스트제도 같은 것을 아주 고정화해버리고, 더 흔들 수 없는 것이 되게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사회적이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미 없어져야 했는데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힌두이즘이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교도, 유대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는 그것과 싸워 출발했다. 그러나 기독교도 교리와 제도를 만들어 그것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범했다. 성전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렸다. 그것이 관념화되었고, 그것이 국제세력과 야합, 똑같은 악마성을 드러냈다. 서구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유럽이 세계를 점령 할 때, 철저하게 그것이 이용됐다.

스페인의 가톨릭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백인을 우월하게 만들었고, 흑인들은 백인을 섬기도록 교리화 했다. 스페인의 한 신부는 잘못된 교리화와 싸웠다. 그는 가톨릭 법정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싸움은 나중에 흑인신학, 해방신학을 태동시키는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했다.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는 이씨 조선의 핍박을 받으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다.

모든 종교는 분명하게 평화를 내세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영미선교는 처음 군대가 들어가고, 목사가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사가 들어갔다. 완전히 선교사도 점령군으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스페인 카톨릭이 남미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미국에 들어간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남미의 선교사들은 사람을 죽이면서 점령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거룩한 전쟁’이란 이름아래 기독교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 지금도 이 ‘거룩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로마를 거쳐 유럽에 간 기독교는 자신의 문화에 맞게 안착시켰다. 하지만 유럽인에 의해서 남미로 간 기독교는, 그 나라를 지배하면서 유럽식세계화를 시작했다. 17세기 이후부터는 영국을 선두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여타의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유럽의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한마디로 토속민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구의 팽창주의는 결국 세계의 질서를 깨고, 평화에 위협을 가했다. 우리나라도 영미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의 합작으로 일제 36년이라는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났다. 피선교지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킨 선교는 실패한 선교이다. 현실을 외면한 선교이다. 콜럼버스는 미 신대륙을 향해 떠나면서 한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말이 바로 영미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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