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율법들은 모세 5경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다. 이 모세 5경 전체, 더 나아가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서’라고 부를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존중한다. 후기 유대교를 ‘율법종교’라고 부를 정도로 율법이 유대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교나, 기독교가 율법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성서에 나타난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가(?) 편의에 따라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가 아닌가.

‘신명기’법전은 고대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고, 형제애를 강조하는 휴머니즘적인 법전이다. 휴머니즘에 투철한 법전으로 이름 난 ‘함무라비’법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질적으로 하무라비법전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러한 휼륭한 법전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휼륭한 나라는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가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지닌 율법을 하나님이 내려준 율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왕과 권력자들은 율법을 안중에 두지를 않고, 율법의 정신을 짓밟아버렸다. 그것은 현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성서의 율법은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수탈과 억압. 종노릇을 하면서 당했던 고난이, 다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국가적 안정을 누렸던 것은 북방 수매르 제국이 몰락하고, `앗시리아 제국이 일어서기까지의 정치적 공백기에 해당하는 족장공동체의 짧은 기간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제국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 예언활동을 벌인 것은 바로 국가의 위기와 멸망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식민지 상태는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왕국을 거쳐 로마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었다. 우리도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36년 동안 압제와 착취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다. 우리의 운명보다도 못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역사란 억눌린 자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시간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루하고 긴 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 압제자들과 싸우기는 불가능했다. 하나님의 개입을 열망했다. 이것은 식민지와 자국의 국왕 밑에서 당했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통치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열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초월적이고 피안적인 세계나, 죽은 후에 이르게 되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 나라들을 지향하고 극복 할 대립 개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변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현실을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내세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과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 불구자, 정신병자, 혈우병자, 가난한 자, 슬픈 자, 우는 자, 소외된 자 등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외면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복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소외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는 즉 이웃으로부터의 소외이며, 자신으로부터 소외이다. 이것은 인간다움의 상실이며, 생명의 기쁨의 상실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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