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세계화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가르쳤나. 모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 안에서 평화를 배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 물음과 답은 6월 보훈의 달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 우리는 얘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들을 예수님은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셨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너를 사랑하지만, 예수님은 너를 위해서 너를 사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만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 사랑만이 마음에 가득찬 증오심을 몰아낼 수 있다. 증오로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불이 붙었을 때, 증오의 힘은 극복되고, 평화와 정의의 시대가 도래한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사인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배웠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 많은 천군,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고 노래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상산수훈에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는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탔다. 나귀 새끼를 타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평화의 복음을 몸과 행동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기를 만드는데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달러를 소모하고 있다. 이런 사이 굶거나,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평화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평화,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한마디로 공허하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남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배웠다. 예수님은 남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옛 인간은 자기만을 위한 존재였다. 우리는 옛 인간의 존재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존재, 실존에 참여하자. 예수님은 또 빛의 자녀라고 했다. 어둠으로는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 길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

이밖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듯이 이제 우리도 공통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또 항상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밖의 실제를 믿을 떼, 감사와 기쁨의 기도가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옛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성을 입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교육이다. 새 인간이 되기 위해, 새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회개). 구조악 속에서 자기 안일에 빠져 사는 길은 항상 자신도 파멸에 빠질 뿐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교육주신 사랑하는 마음, 평화를 실천하는 마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 빛의 자녀된 삶,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삶,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만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기대할 수 있다.

/인천 갈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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