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세계화시대, 글로벌시대라고 말한다. 세계화의 본질과 의미는 현대의 경제관계를 소외시키고서는 정의할 수 없다. 경제학자와 지식인들은 세계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이 신자유주이라고 말한다. 구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 특히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고 말한다.

19세기 새롭게 등장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국가로부터의 자유, 관료체제로부터의 자유,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에 맡기다보니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면서, 빈곤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점점 더 빈곤해졌다. 이것은 국가 간의 관계로 이어졌으며, 교회도 부자교회는 계속 부자교회가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는 계속해서 가난해지는 모순이 드러났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계속 부를 축적하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적, 정치적 식민지가 되어 자국의 부와 자원을 수탈당하고, 강대국의 잉여농산물들을 처리하는 시장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유럽의 식민지세력들을 향해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설교한다. 교인들은 이런 쓰레기같은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감동을 받는다. 이것이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예수믿고 구원받고, 천당가라’만 외친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하나님나라를 외친다.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 하나님을 ‘성전 하나님’, 예수님을 ‘성전 예수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교회가 스스로 게토화되어 세상을 향해 공의의 하나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간난한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 활동을 왜곡시킨다.

부자나라들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착취와 점령의 결과는 모두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교회 역시 부자교회가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빼앗아 교회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선교’라는 이름으로 쓰고 남은 것을 작은교회들에 나누어 준다. 분열과 갈등, 교파주의에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같은 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 보니 교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계속해서 심화되고, 문을 닫는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70-80년대 다방만큼이나 많이 생겼던 교회당은 점점 문을 닫고, 대신 수억원에서 수백억원을 삼켜버린 공룡교회들이 경쟁적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를 정당화 해 주기 위한 미국의 ‘교회성장론’이 한국교회에 상륙, 휩쓸고 지나갔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폐단을 비판하고 나섰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가난한 나라들은 물리적인 전쟁에 점령당하고, 정신세계까지도 서구 사람들에게 점령당했다. 유럽민족은 점령한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게 하고, 자기들의 옷을 입게 했다. 또 자기들의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주는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우리의 문화보다도 이국적인 양식에 길들여져 버렸다.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당의 건축양식부터 교회내부까지 모두 서구의 모습 그대로 모방했다. 그 어디에서도 한국적인 모습의 교회당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켰다는 결론이다. 그것은 교화의 각종해사의 음식도 서구 것을 따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세계화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건축양식 등 서구의 문화가 점령

갈레아노는 “콜럼버스 이래로 유럽인들의 눈에 남미인들의 문화는 문화가 아닌 민속, 그들의 종교는 미신, 그들의 언어는 방언, 그들의 예술작품은 수공업으로 이해되었다”고 지적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서구의 가난한 민족의 침략과 점령은 대부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며,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점령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부선교사들의 형태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깨우치기 위한 교육사업, 자선사업을 벌여 수명을 다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 백성의 아픔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몰각시켰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조선인의 의식화와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철저하게 막았다. 그것도 정교분리를 내세워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를 막았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에게 “예수믿고 구원받고, 천당가라”고 외쳤다. 100년전 스코틀랜드에서 실패한 선교전략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조선의 백성에게 적용시켰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개인구원만을 강조하고, 사회구원, 집단적인 구원을 터부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는 개인이기주의와 개별교회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집단적인 구원, 사회구원을 말하는 목회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교인들의 주머니를 갈취하는 사이비가 문제이다.

피안적이고, 추상적인 영성, 영적, 구원, 성령 등의 이름으로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나라의 척도가 헌금의 액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등장했다. 헌금을 많이 거두어 드리지 못하는 목회자는 무능력한 목회자이다. 교인들은 교회의 사이즈와 돈으로 목회자를 평가한다. 따라서 작은교회의 목회자들은 설자리를 잃어버렸으며, 신학교와 신학대학은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고 있다. 유명신학교들도 학생수를 줄이고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팔아서는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자녀들은 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세습이 문제가 되면서, 변칙으로 세습을 단행하는 교회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가장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한국교회를 국민들이 인정하겠는가. 헌금을 많이 드려야 축복을 받는 교회라면,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강남의 일부 교회는 주일마다,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는 부자교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목회자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며, 목회를 한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타락한 서구교회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서구 교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자리잡았고, 교회당은 크렘린궁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교회를 향해 비판하는 언론과 국민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국민들은 교회를 향해 아직까지는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교회를 향해 돌이 날아올지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 어는 학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부자교회들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것은 주일날 기사를 대동하고 교회에 나오는 부자교인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교인들의 설자리를 없애버린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미 한국교회는 바벨탑을 너무 높이 쌓았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바벨탑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한다. 소금의 맛도 잃어버렸다. 이것은 교회가 본편적 가치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이런 것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타난 것이 해방신학이며, 민중학신이다. 떠 여성신학이며, 머슴신학이다.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 회복해야

한국의 개신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출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고 신대륙을 정복했던 그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콜럼버스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고, 항해에 나섰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결과 세계화는 오늘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독일의 잡지 <슈미겔> 기자가 지적한 대로 유럽의 세계화는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했다.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고,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다.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그렘린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적 문명이 되었다.

영미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대한민국에서의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수명을 다한 조선의 백성들은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고 있을 때, 영미 선교사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전해준 기독교선교는, 한마디로 조선백성들에게 희망이었다. 문제는 영미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는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했다는 것이다.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던 조선에서의 선교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정교분리‘를 강력히 주창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담당하고, 교육적,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사들이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피압박민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선교였다. 영미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들의 의식화와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영미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조상이 미대륙을 점령하면서 굳게 믿었던 “지구상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을 조선에서도 그대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피압박민족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한마디로 민족의 희망이었다. 짧은 기간에 조선의 백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한 기독교는, 지식인과 깨어난 백성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가 되었으며, 우리의 음악은 ‘국악’ 혹은 ‘민요’, 춤은 민속춤이 되었다.

이것은 서구의 것이 보편적이고 우월하며 우리의 것은 그것에 비해 열등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화가 가져다가 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과 그에 기초한 기독교 역사가 추구한 세계화는 오늘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신자였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떠나면서 아우구티누스의 기도문을 되새겼다는 사실 속에 답이 들어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의 기독교인 중 민족의식을 자각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서 만주로 떠나는 아들과 남편, 일본군 정신대로 끌려가는 이 땅의 소녀, 일본군에 끌려가는 이 땅의 청년 등을 위해 아리랑고개를 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그래도 오늘 한국교회가 체면을 유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영미 상업자본주의와 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일 수 없다. 개별구원을 내세워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권력과 교회와의 결탁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없다. 교회가 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맘몬을 물리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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