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사도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파였다. 그는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스데반을 처형하는데 가담하기도 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자유로운 은총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철저한 유대교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동지였고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끝없는 박해를 당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의 모함에 의해서 당국에 잡혀 고문도 당하고, 감옥살이도 했다.

바울은 마음이 아팠다. 자기를 박해하고 못살게 구는 유대인이 미워서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괴로웠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가슴 아픈 일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대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끊어져도 좋다고 했다. 바울은 이스라엘 구원에 대해여 입을 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했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 것은 어쩐 일일까?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접붙임을 받은 것이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둔 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불순종에 빠진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맡긴다. 죄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내리고, 불순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결국 구원에로 이끄는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찬양한다.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여” 그리고 찬양에 이어서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 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로마서 12장 1절)

여기에서 ‘형제들이여’는 아주 기분 좋은 말이다. 바울은 서신에서 ‘형제들이여’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사도로서 가르치는 자로서 많은 교회를 세운자로서 바울은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았다. ‘형제들’이라고 부름은 신분적인 차이나, 상하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바울은 당신과 대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에 바울의 말속에는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성서의 진리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고,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밝힌 것은 큰 공로라고 힐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서로 형제라고 부름으로서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가 그대로 담겨 있다. 형제들이란 말 속에는 하나 됨의 의미가 있다.
형제는 혈연적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형제는 같이 먹고 같이 사는 공동운명체이다. 형제 관계는 핏줄로 이어져 있다. 누구도 형제의 끈을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애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이다.
바울은 만나 본적 없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을 형제라고 불렀다. 바울은 “만나본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동등하다. 우리는 하나이다란 뜻을 담은 형제들여‘란 부름의 말은 얼마나 좋은 부름의 말인가.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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