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탁기 목사
한국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종교가 정치와 매우 밀착되어 있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종교가 정치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나라의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사회적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를 길러내는데 중심에 있었다. 한국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했는가 하면, 105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곱게 보지를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1930대 후반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쉽게 동화되어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등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장로교회를 비롯한 감리교회 등 대부분의 교파들이 앞을 다투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한국의 젊은 여성과 젊은 남성들을 향해 황국의 신민으로써 정신대와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하는 등 민족 앞에 큰 죄를 범했다. 이 보다 큰 죄는 한국교회 대부분이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등 배교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초기 한국의 기독교가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제국주의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것은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해방후 장로교단의 분열로 이어졌다.

한국기독교의 권력과의 밀착은 해방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교회가 자유당 이승만독재정권 아래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도,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독재정권의 총칼아래서 쓰러져가고 있는데도, 독재정권을 정당화시켜주는 일에 앞장섰다. 유모목사, 양모목사 등의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은 6.25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인권운동과 평화통일운동, 에큐메니칼운동,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했던 NCC 계열의 교회지도자들도, 문민정부와 참여정부의 권력에 편입되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표류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에큐메니칼운동은 서구 재정적인 지원이 중단되면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구적이고, 부유한 교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정관을 바꾸어 보수교단의 책임자들을 의장으로 영입, 운동의 주도권을 이들에게 넘겨주는 오류를 범했다. 이렇게 에큐메니칼운동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몇몇 목회자들의 운동으로 자리를 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일치운동의 신뢰성이 자연스럽게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다가주었다.

이와같이 한국의 기독교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공교회로서의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기독교지도자들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개별 교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돈에 길들여진 나머지 교회 연합과 일치운동을 돈 있는 인사들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 다음은 한국교회가 공교회로서의 공공성을 상실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게 선교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서구의 교파주의와 고리를 끊지 못하고, 맘몬신과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단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를 비롯한 ‘엑스폴로 74대회’, ‘1977년 복음화 성회’ 등은 정권과 밀착된 대형집회였다는데 이의가 없다. 한국기독교는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었으며, 정부는 군을 동원해서 행사장의 시설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단체는 성장한 한국교회에 걸맞지 않게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불우이웃돕기, 해외문화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권력과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스도의교회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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