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기득권층인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법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은 한마디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떠돌이 등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로마의 식민지와 예루살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황에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인권선언이다. 예수는 이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권선언을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방점이 찍힌다.

오늘 한국개신교회에서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개교회 내규나, 교단의 헌법, 노회의 법규 등을 보면, 예수님의 법정신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내규는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 보다는 목회자 개인에게 맞추어져 있고, 노회의 법규와 총회의 헌법은 치리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법과 내규는 예수님을 교리화 시키면서 철저하게 악용됐다.

오늘 개신교회는 성서의 진리라는 이름 아래 교인 간, 교단 간, 목회자와 교인 간, 교단내의 분규, 담임목사와 원로목사간의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한마디로 작금의 교회 내 내규나, 법규, 헌법은 교인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목회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 교권주의자들을 위해서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런 법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잦은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툼이 끝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 중 상당 액수가 소송비용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변호사만 좋은 일을 시킨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교회 때문에 변호사가 먹고 산다는 것이다. 현재도 많은 교회들이 사회법정에서 재판 중에 있다. 이런 사이에서 많은 교인들이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

지난 2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된 성락교회는, 방송 이후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났으며,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의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지키기 위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교회내부의 다툼은 교인들에게 상처만 남길 뿐, 교회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운동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중재자로서, 화해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해자여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툼의 중심에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공중파 방송을 통해 한국 중대형교회의 다툼과 잘못된 목회자의 모습이 방송될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나라 선교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개신교회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한다. 한국개신교회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언론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법정신은 다툼과 분열의 현장에서 ‘평화(샬롬)’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성이 그대로 깔려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독생자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느냐 아니면 아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법도 사람을 위해서 있다. 그리고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교회지도자,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해 줄 때도 성서의 법 악용
예수님의 법정신, 하나님의 법을 악용하는 바리새파 법주의자들과 충돌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님의 인권선언대로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와 제사장을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로 적용,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괴롭혔다. 결국 이것은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따르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크게 위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하나님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국민 전체를 기동화 하는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는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고,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셨다. 한마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철저하게 동원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제계층에 국한된 정결법을, 이를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해서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교회당을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교회에 나오기 전에 몸을 정결케 하라” 등등 성서와 대치되는 천박한 말들을 강단에서 쏟아낸다. 이런 말들은 매일매일 식량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거나, 운전수, 열차기관사 등 주일날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정결법은 생활전반에 파급되어 있었다. 이는 가난한 자, 병든 자, 불구자, 불결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중에 예수님과 충돌의 계기가 된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손 씻는 것은 제사 전에 사제가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제법에 근거한 것인데, 종교적 권위로써 제재하는 법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생활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도 되지 못하고, 사람을 삶에서 유리시키고, 정죄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런 법은 인간을 위하는 법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게는 사람의 삶의 현실보다도, 그 법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문제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파의 입장이다.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것은 못 가진 자들의 구체적 삶의 자리이다. 구약의 법정신에 따르면, 배고파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모세의 법으로 생활규율을 세우고, 모세를 권위로 내세우면서, 그 기본정신에는 아랑곳하지를 않고, 단지 안식일법, 즉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시각에 경직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또 한 손이 오그라진 자를 고쳐 주셨다. 그는 사회적 약자였다. 그를 불구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곧 모세의 법정신이라고 했다. 바리새파는 누가되었던 안식일법에 위반되었다고 고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안식일법 제정의 본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법의 정신에서 유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조문을 바리새파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또 모세의 법은 이혼했으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들이 이 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했다.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혼을 편법으로 삼았다. 이런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법에 대한 입장이 단호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은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법은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데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것을 방해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법을 파괴하지 않았다. 단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하는 자유조차 가로 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법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법에 예속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괴변에 불과하다. 오늘 목회자들은 이 말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가. 독재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초기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들이 일본식민지를 정당화 해 주는데 악용되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을 때도 악용됐다.

구체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장4절)고 법주의자들에게 물었다.

이 말은 법을 위해 법을 내세우는 법주의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사랑을 가로막는 법질서, 그것은 본래 법의 정신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일부 정치적인 목회자들은 교단의 헌법과 규칙 등을 내세워 동역자를 죽이고, 교회 내규를 내세워 교인들을 치리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 교인들 간의 사랑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특히 목회자들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회의 법을 고치고, 교회 내규를 만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소송사건에서 승리하면, 거기에 도취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이것을 하나님의 승리라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앞을 다투어 교회내규를 만들고 있는 것도, 바로 목회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크게 벗어난 것이다. 법주의자들은 어떤 행위나 그것이 법조문에 저촉되느냐 만을 묻는다. 이러한 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한 법정신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법주의자들과 충돌했던 행위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행위마저도 제약하고, 방해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해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예수님의 해방은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들이 제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성서의 법정신, 예수님의 법정신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성서의 법, 정의로운 사회 건설

법주의자는 어디까지나 외향적이고, 형식주의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것은 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 법을 왜곡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교묘하게 옭아매는데 이용한다. 예수님은 그런 법주의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법집행이 형식논리에 지배될 때, 법은 자체의 정신에 침해를 받는다. 그리고 인권유린의 구실이 된다.

인권을 유린하는 법은 그 동기가 어떻든 용인돼서는 안된다. 바리새파는 법을 국민운동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서, 어쩔 수 없이 법의 한계를 드러냈다. 한마디로 민족전체의 정신운동을 위해서 법질서를 원용했다. 즉 그 법질서를 지키는 자는 ‘의인’이고, 못 지키는 자는 ‘죄인’으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지키는 자와 못 지키는 자의 분계선은 종교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압도적 다수는 그 법질서에 순응 할 수 없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능력이 없었다.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범법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법이 ‘하나님의 법’, ‘모세의 법’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들은 결국 종교사회인 이스라엘공동체의 변두리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사정도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죄인’으로 낙인찍고, 교회의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소외시켜 버린다. 한마디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행동하지 않는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으로 가라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활동하며, 친히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옹호했다는 구실로 범법자, 범법 방조자, 선동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가복음 7장15절)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무능한 왕권 아래서 평생 사람대접을 못 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족이 교회에 몰려들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이를 잃어버리고,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이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잘난 인간들이 빼앗아 버린 것이다.

백낙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에 있어서 전형적인 교회는 시골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이다”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반면 서구정통신앙에 물든 이광수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지적수준이 낮은 것을 비판했다. 이 두 사람의 견해는 오늘 한국교회의 양면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법정신과 사역은 공생애 전체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법을 내세운 자들은 법으로만 예수님을 제재할 수 없어지자 정치권력과 야합해서, 법이 법을 유린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처형했다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 관점은 예수님의 수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새 법전의 정신과 그 방향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병무 박사 역시 자신의 저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년, 한길사)에서 이같이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법질서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유린한다고 보고, 그것과 싸웠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