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재 범 목사

저녁 무렵 두 사람이 침통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가고 있었다. 이들은 쓸쓸하고 허전한 모습으로 가슴에는 슬픔을 가득 안고 있었다. 얼만 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힘없이 걸었다. 이들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따랐다.

희망을 걸었는데 그만 예수는 사흘 전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의 부풀었던 꿈과 희망은 온다간데 없어지고 삶의 의욕도 사라졌다.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큰 능력을 보였던 예수님은 대사제와 권력자들에게 붙잡혀 로마 병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혀 용기를 잃고, 깊은 좌절에 빠졌다. 세상 일이란 모두가 허망한 것이냐? 진리와 사랑을 위해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일한 분이 불의한 세력에 의해 그렇게 힘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외쳤던 분이 왜 죽어야 했나?(누가복음 24장 28-35절)

인류의 역사는 진리 편에서 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총•칼을 가지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불의한 사람들의 싸움판이었다. 당시에는 언제나 총•칼을 든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죽음이 궁극적인 것이라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이라면, 역사는 총•칼을 쥔 자들의 승리로 끝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샬롬에 의한 평화를 말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총•칼에 의한 평화, 팍스를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획은 무너지고, 죽음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이, 몸시 아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엇을 때, 늘 함께 살았던 사람이 병으로 죽었을 때, 사랑하는 자식이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했을 때, 우리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맞보게 된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아무리 안간 힘을 써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의 재주와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의 슬픔과 좌절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때문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담보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통치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좌절되었다. 사랑과 진리를 위해서 몸을 내 맡긴 예수님이 불의하고 악한 세력에 의해 줌임을 당하다니!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하나. 이 세상에 하나님은 있는 걸까.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세력의 창과 칼이란 말인가.

이렇게 낙심하면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곳에서, 유대의 권력자들과 로마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곳에서, 역사를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로마군병들이 창을 들고 지키는 돌무덤 속에 예수님을 벌려두지 않으셨다. 인간들이 설치한 모든 방벽과 좌절을 뚫고 모든 것을 허무에 빠뜨리는 죽음을 깨뜨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들은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고, 율법적인 강제를 당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림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고 죄와 율법의 굴레를 벗겨 주셨다. 하나님은 절망과 좌절을, 희망과 용기로 바꾸어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다.

예장 성서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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