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성서를 가난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구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시련을 주제로 하고 있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병들고,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에 벌인 역사적인 사건들에 의해 생겨났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기근과 노예제를 피해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히브리인이란 말은 어떤 특정한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천민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의 전체적 흐름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담겨 있다.

히브리인들은 집도, 토지도, 가축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남의 것을 약탈하거나 노에가 되거나 돈 받고 전쟁해 주는 용병노릇을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다. 한마디로 히브리인들은 춥고 배고프고 이가 갈리는 사람들, 생활 자체가 조상들을 원망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한에 맺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착취와 노예생활에 시달리다가 탈출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팔레스티나 땅에서 부족연합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다스리는 이 세상의 나라에서 얼마나 억눌리고, 수탈을 당했으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을 갈망했겠는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은 고통스러운 경험과 새로운 나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갈망 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처럼 성경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조화롭고 질서 있는 고상한 삶을 추구한다.

유교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사상이 아니라, 왕과 관리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문제를 삼은 지배층의 사상이다.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이 깨끗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추구한다. 개인의 정신적인 평화를 얻기 위해 도덕적이고 종교적 수행에 힘을 쓴다.

이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집단적인 고통, 배고프고 춥고 고달픈 괴로움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 노여움을 어떻게 극복하여 정신적인 자유에 이를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둔다. 그밖의 여러 종교들도 나름대로의 사상은 있지만,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는 경전은 없다. 오직 성경 뿐이다. 성경이 세계민족에게 있어 많이 읽혀지고,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재해석되는 이유가 바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브리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팔레스티나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공동체를 세우고,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았느냐는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결코 평화스러운 삶을 살지 못했다. <판관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끊임없이 이웃부족과 전쟁을 했고, 이웃 부족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사울이나 다윗과 같은 지도자이 나타나 이웃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조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는 되지 못했다.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이 나타나 가난한 사람들은 다시 경제적으로 빼앗기고, 억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앗시리아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700년동안 강대국들의 식민지가 되어 신음해야 했다. 이들의 역사는 어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해방될 날, 승리의 날을 학수 고대하는 기다림의 역사였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기를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기다렸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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