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 만에 시편을 번역하여 '시편촬요'를 발간했다.(1898).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누구인가

▲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 중에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구약성경은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한국명 피득)가 1898년도에 번역해서 내놓은 <시편촬요>(대한 광부 이년 무슐, 구셰주 강성 일천 팔백 구십 팔 년)이다.

피터스 목사는 <시편촬요>를 출간한 이후, 구약젼셔 번역과 개역구약성경 완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피터스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구약성경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공로자요, 우리민족과 한국교회의 은인이다. 한국 기독교선교와 구약성경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피터스 목사지만,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기념비 하나 없어 서글프다는 것이 구약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에 소재하고 있는 그의 묘소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다.

구약학자인 박준서 박사(연세대학교 구약학 명예교수)는 훌러신학교 연구교수로 3년 동안 있으면서,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패서디나 공동묘지를 헤집고 다녔다. 공동묘지의 잔디와 잡초속에서 그의 무덤을 찾았다. 그곳에는 그 흔한 작은 묘비조차 없었다.

1871년 제정 러시아시대,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피터스 목사는 히브리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성장했다. 피터스 목사는 19세기 말(24세) 일본 나가사키에서 처음 교회에 출석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여기에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세례를 준 선교사의 이름에 따라 피터스로 개명했다. 당시 정통파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가문에서 추방을 당하고, 혈연관계가 단절됐다.

▲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회장 박준서 박사.

1895년 한국에 온 피터스는 3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그의 언어 감각은 뛰어났다. 곧바로 <시편촬요>를 번역했다. 또한 찬송가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과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를 작사했다. 그리고 구약성경 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능통한 히브리어를 활용해 구약성경 번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11년 구약젼셔 최초의 한글번역 구약성경전서를 내 놓았다. 또한 구약성경 개혁위원회 평생위원으로 개역 구약성경 출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46년 동안 한국교회와 한국선교, 그리고 구약성경 연구의 변화와 발전에 공헌한 피터스 목사가 70세에 은퇴 이후, 그의 행적을 한국교회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기독교 선교역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피터스 목사는 은퇴 후, 미국 LA지역 패서디나시 소재 은퇴선교사 주거시설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87세였다.

묘비 하나 없이 잡초와 잔디에 뒤덮혀 무연고 묘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아낸 박준서 박사는 LA지역 연세대학교 동문들을 중심으로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의 뜻을 모으기로 했다. 그것도 큰 교회서 담당하면 좋은 것을, 한국교회 전체가 피터스 목사의 뜻을 기리고, 잊힌 그의 업적을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회자와 교인들로부터 작은 정성을 모으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기념사업회는 피터스 목사 묘소에 한국교회 교인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은 기념비를 건립키로 했다. 또한 공적비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도 건립하는 일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후대에게 알리고, 감사하기 위해 ‘성경’과 ‘선교’를 주제로 하는 기념강좌도 준비하고 있다.

또한 피터스 성경연구원도 개소, 피터스 목사의 관련자료 수집 및 전기 발간, 성경연구 및 세미나, 공개강좌 정례화, 성경연구결과 출판 등의 사업을 벌여, 그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박준서 박사는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호소했다.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슨 목사를 기억하자”

기념사업회 피터스 박사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박차
공적비와 기념비, 연구소 설치, 기념강좌 등을 추진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 첫 시작

피터스 목사의 한국어 구약성경 번역은 수명을 다한 조선말, 일본 식민지세력의 한반도 진입으로 인한 한민족의 고난, 영미 팽창세력의 한반도 진입 등으로 인해 고난 받는 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 할 인물이 절실했다. 그 때 외국어에 능통한 피터스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피터스 목사는 일본 식민지세력 밑에서 압제 당하는 한민족에게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알게 해 주었으며, 예언자들의 예언이 고난당하는 한민족에게 희망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당시 경건주의와 정통주의, 그리고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었던 영미선교사들과 일본 식민지세력은 고난당하는 한민족이 구역성경을 보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막았다.

러시아 정통 유대인인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가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도, 어쩌면 그가 러시아 정통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선교활동을 벌였던 영미선교사들이 주류였으며, 피터스 목사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피터스 목사는 서울에 온 후 3년 만에 구약성경 중 번역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시편’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가 한국어 운율에 맞는 우리말로 시편을 번역했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찬송가 75장과 383장을 작사했다. 이 가사는 피터스 목사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이다. 이 두 편의 찬송은 오늘도 한국교회 공예배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피터스 목사가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변역되고, 이 두 편의 찬송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만큼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은인에 대해서 소홀히 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 소재 Mountain View Cemetery에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묘소. 잡초와 잔디로 뒤덮힌 묘소에는 작은 묘비 조차 없었다.

피터스 목사는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 구성된 구약성경 번역위원회 위원으로 참여, 히브리어 실력을 발휘해서 구약성경 번역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 결과 1910년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했다.

그의 업적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출간된 한글성경을 가다듬어 손질하고 오류가 있는 곳은 계속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또한 구역성경 개역위원회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그 작업은 1938년도에 끝이 났다. 그리고 그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을 주도적으로 벌이고 있는 박준서 박사는 “구약성경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업스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내 영혼을 소생식히시고 자기 일흠을 위해 인도하시는도다.…’ 1938년도에 완성된 개역성경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을 비교하면, 맞춤법이나 고어체만 조금 다를 뿐, 그 내용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1910년에 번역되고, 1938년에 개정된 구약성경의 번역이 잘된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소리내어 읽으면 우리말의 운율에 잘 맞아 감탄이 나올 정도라고 구약학자인 박준사 박사는 거침없이 평가한다. 개역성경은 1956년 한글 맞춤법을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해서 <개혁성경전서>로 출간되었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를 기억하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했다. 한마디로 피터스 목사의 구약성경 번역은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이었다. 그런 점에 피터스 목사의 우리말 구약성경 번역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피터스 목사를 고난 받는 민족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박준서 박사는 말한다.
피터스 목사의 한국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만난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돌아 왔다. 캠벨 여사는 서울생활이 얼마 되지를 않아 폐결핵에 걸려, 결혼생활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캠벨 여사는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피터스 목사는 아내 캠벨 여사를 추모해서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운동을 전개, 가난한 나라의 폐결핵 환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의료선교사였던 의사 에바 필드 여사와 재혼했다. 필드 여사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필드 여사 역시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서 별세했다. 필드 여사도 엘리자베스가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때문에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는 캠벨 여사와 필드 여사가 있는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공적비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이 같은 입장을 전달했으나, 아직까지 답은 듣지를 못한 상황이다.

피터스 목사는 1941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하고, 한국에서의 46년 동안 성경번역자로, 복음(기쁜소식)을 전하는 선교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 LA근교 패서디나 은퇴선교사 주거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준서 교수는 최근 3년 동안 패서디나에 소재한 훌러신학교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피터스 목사가 패서디나에서 별세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근처 묘소를 뒤져 잡초와 잔디에 묻혀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아냈다. 그 흔한 표석하나 없었다. 묘소를 찾는 과정에서 피터스 목사가 누구이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피터스 목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과 미국 선교부에서 잊힌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후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피터스 목사의 공적을 기리고, 그 업적을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어주고 기념하기 위해,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학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기념사업 3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피터스 목사 기념비를 그의 묘소에 세우는 것과 양화진 캠벨 여사와 필드 여사의 묘소가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공적비를 세우는 것, 둘째 피터스 목사 기념강좌 개최, 셋째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피터스 성경연구원’ 설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문의 010-9085-7650번, 후원 100-032-546616(신한은행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조직은 △회장=박준서 박사(연세대 구약학 명예교수) △총무=이사야 박사(남서울대학교) △서기=김종윤 박사(순복음대학원대학교) △회계=박연희 박사(이화여자대학교) △감사=정영호 박사(공인회계사) △자문위원=김중은 박사(전 장로회신학대학 총장), 노세영 박사(서울신대 총장), 박신배 박사(KC대학교), 김은규 박사(성공회대학교), 조화기 박사(한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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