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무술년 새해가 밝았다. 금년도에는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이 투명하게 쓰이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교회분쟁은 목회자의 헌금 사용처를 둘러싼 분쟁이다. 이러한 때 오늘 한국교회의 재정운용의 실태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헌금이 투명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를, 특히 금년도부터 시행되는 종교인 과세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인지하면서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 재정의 기초는 헌금

한국교회의 재정의 기초는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이 드린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등 130여종에 달하는 헌금이다. 그래서 교회재정은 교인들이 하나님나라선교를 위해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교인들이 낸 헌금은 재정위원들이 예산을 세우고, 공동의회 등을 거쳐 확정되어 집행하기 때문에 투명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럼에도 교인들이 교회재정 운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의 재정이 하나님나라선교를 위해서 지출되는 것보다도, 목회자 한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재정이 지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교인들이 드린 헌금을 비자금으로 만들어 정치적,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모교회의 담임목사는 2천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형성, 이를 관리하던 장로가 100억원이 넘는 담임목사의 비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 장로는 담임목사의 추궁과 비자금을 채워 놓을 수 없게 되자 아파트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어찌 보면 담임목사가 비자금을 관리한 장로를 간접 살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교회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과세’가 시행될 경우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한 교회들이 국가의 세무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의 재정 대부분이 목회자의 생활비와 활동비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교회의 재정 상당부분이 부동산 투기 등에 지출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여기에 해당되는 교회는 상위 10%도 안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교회가 ‘종교과세’가 아닌 ‘종교인 과세’를 주장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영수증 없이 교회의 재정이 담임목사에 의해서 지출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비를 비롯한 구제비 등을 예로 들고 있다.

문제는 작은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까지도 종교과세를 반대하고 있다. 그것은 작은교회들이 큰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아니 교인들이 드린 헌금은 이미 세금을 떼고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종교과세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정부의 종교과세가 강경해지자 한국교회는 정부와 협의해 ‘종교인과세’로 합의했다.

그렇다고 본지가 ‘종교과세’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있는 곳에는 세금이 따르게 마련이다. 국민들의 경제 역시 이 모양, 저 모양을 세금을 떼고 받은 경제이다. 한국교회가 주장하는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은 이미 교인들이 세금을 떼고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종교과세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 중 세금을 낼 수 있는 목회자는 상위 20%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들이 세금을 국가에 내고, 생활을 보장 받아야 한다. 그것은 목회자도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 70% 이상의 목회자들은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사례비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 문제는 이들이 왜 종교과세를 반대하고 나섰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에서 기인하고 있다. 존 로크는 “국가가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위해서 국가가 종교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는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종교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로 홉즈는 종교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가 종교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세를 부과하고 있는 독일 등의 나라들이 홉즈의 영향을 받아 국민 모두가 종교세를 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과세를 둘러싼 논쟁 여전

영미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워 종교과세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 교회의 교인들은 국가의 종교과세에 대해 ‘사탄의 장난’이라며, 거리에서 국가의 종교과세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돌이는 일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이중적인 논리를 편다. 이 세계의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창조신앙과 배치되는 논리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데 인색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헌금의 투명성을 담보해 내는 것은 “교회재정=사회봉사=사회적공신력 회복”의 등식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십자가탑을 높이는 일과 목회자의 정치적 활동을 위해서 지출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는 1년 예산을 집행하고, 남은 재정에 대해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재투자하거나, 주차장을 비롯한 수련원 등을 구입, 재산을 늘리는 일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다 일부교회에서는 교회재정의 일부가 목회자의 비자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또한 심방 등을 통해 받은 사례금은 철저하게 목회자의 몫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70%이상이 미자립교회인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목회자들은 국가의 경제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이들은 작은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다. 부자교회들은 부자들의 상황에 맞게 교회를 건축하고, 십자가탑을 높이고, 교회장식도 호화롭게 꾸민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좋은 일을 다른 종교에 비교해서 많이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교회의 이 같은 국민들에게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성서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을 성전에 가두는 행위는 적그리스도이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바리세인이며, 율법주의자이다고 말한다. 때문에 교회의 재정은 사회적 봉사를 통해 공신력을 담보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것이며, 해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며,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밥상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를 창조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한 것이다”고 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으며, 이 곳이 또 예수님의 생활 현장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성서의 경제정의는 한마디로 ‘나눔’이다. 그것은 하늘을 혼자 가질 수 없듯이, 하나님나라에 혼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들을 섬기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곳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이며, 통일의 현장이다. 교회의 재정을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성서의 경제관 ‘나눔’을 실천해야

교회의 재정의 47%는 십일조 헌금이 차지하고, 나머지 52%는 주정헌금, 감사헌금 등으로 조성된다. 한국교회 헌금의 종류는 130여종에 이른다. 이 헌금이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엉뚱한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재정구조는 크게 교회내의 직접경비와 교회 밖의 간접경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교회내 직접경비는 교역자 급여를 비롯하여 목회비, 예배비, 교육비, 건축비 등을 말하고, 교회 밖의 경비는 해외선교비를 비롯하여 상회비, 사회봉사비 등을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회 밖의 간접경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활할 때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소외된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예산의 일부를 사회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액수는 한 자리 숫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교회의 내적예산을 제외하고, 나머지 예산은 건축비 등 교회의 바벨탑을 쌓는데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교단과 교회는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들을 위한 쉼터를 비롯한 요양원, 사회복지관, 무료급식소,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쉼터, 미혼모보호소, 노동자의 집 등을 운영, 교회재정의 투명성을 담보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 밖의 재정은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예산의 대부분을 교회 내에 매몰시켜 사회와 담을 쌓고, 교회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지원하는 일도 교인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며, 넘치는 예산은 교회재산을 증식시키는데 투자하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일부 교회는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제1금융권을 비롯한 제2금융권, 사채시장 등에서 돈을 빌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한국교회가 제1금융권에 지고 있는 부채는 30조원을 달하며, 매년 이자로 3-5조원이, 하나님의 헌근이 이자로 새어 나가고 있다.

과거 한국교회가 선교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도시교회나, 농촌교회 모두가 지역사회의 가난한사람들을 향해 재정의 일정부분을 환원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는 교회마다 야학을 열어 무지한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 의료봉사를 통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이러한 복지사업을 통해 교회재정의 투명성을 담보해 냈다.

오늘 일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사회봉사에 대해서 인색하면서, 자신의 명예와 품위유지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헌금을 사정없이 사용하고 있다. 일부 목회자들이 호텔 등의 모임을 갖고 있는 사이, 농어촌의 작은 교회와 도시의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은 씁쓸한 미소를 띠운다는 사실에 부자교회들은 주목해야 한다. 목회자들의 잦은 호텔모임과 해외여행은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헌금이 투명하게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일부목회자들이 호텔모임과 해외여행을 강행하는 것은, 호화로운 모임과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들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이 같은 의식이 변화되지 않는 한, 교회 재정에 대한 투명성을 담보해 내기 힘들다. 한마디로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을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과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부채질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개신교의 이러한 현상은 일부교회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의 한국교회가 그런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는 십자가탑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 등에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서의 신명기법전을 비롯한 계약법전, 성법전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전이다. 예수님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 오셔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셨으며, 이들의 삶의 현장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성서의 관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성서는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이 어디에 사용해야 옳은 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