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 위해 수단 가리지 않는 구조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현장은 맘몬 우상으로 가득 차있다. 맘몬이 신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없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돈 때문에 자식도 죽이고, 부모형제도 살해한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태가 되었다. 담임목사 세습도 돈 때문에 일어나고, 돈 때문에 담임목사 세습을 극찬하는 성명서도 발표한다.

돈 때문에 고향도 버린다. 교회 역시 돈에 환장해 있고,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부패 할 때로 부패해 악취만 풍긴다. 돈으로 교회 직분도 사고, 총회장도 사고, 노회장도 산다.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돈이 없으면, 장로도, 권사도 될 수 없는 것이 타락한 한국교회이다. 돈이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 살인범도 살린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사회와 교회가 되었다. 한마디로 오늘 우리사회와 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선거가 한창이다. 후보 간에 공명선거를 말하면서도, 뒤로는 부정한 돈이 오고간다. 총대들은 후보들 간에 경쟁을 부추겨 금품선거를 조장한다. 또한 과거 한기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선거를 앞두고, 대표회장에 나온다고 소문을 퍼트린다. 그리고 돈이 많은 인사에게 줄을 대 3000만원, 2000만원을 챙긴다. 배달사고도 낸다. 대의원 수를 계산해서 흥정도 한다. 순진한 후보는 거리낌 없이 수 천 만원의 돈을 건넨다. 이를 제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목사들의 양심은 쓰레기통에 구겨 넣어 버렸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돈에 환장해 있다.

세상선거도 이렇지 않다.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선거, 지방의원 등에서 금품을 제공하면, 후보도, 금품을 받은 사람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헌데 한국교회의 교단장 및 단체장 선거는 그렇지 않다.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선거가 끝나고 돌아오는 것은 다툼이며, 분열이다. 가장 양심적이면서 도덕적이어야 할 목회자들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한다.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교인들 역시 목사 알기를 O같이 안다.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다. 소금의 맛도 잃어버렸다. 예수님이 가장 배격했던 돈의 소리만 들린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돈’이 곧 ‘신’이 되어 버렸다. 돈이 목사의 위상을 높인다. 교회의 사이즈로 목사를 평가한다. 목사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장로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그 가족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죽임당한 아버지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한다. 답답하다 못해 숨통이 막힌다.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된다.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이를 지키기 위해 겉으로는 평화를 노래하며, 주여! 주여! 외치며, 신의 눈을 가린다.

한국교회에 안에서,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과 지구를 살리기 위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반핵운동을 벌여야 할 목사의 입에서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핵무장을 주장한다. 돈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양심이 되어 구린내를 풀풀 풍긴다. 역겹다. 구역질이 난다.

이런 한국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희망을 걸지 않는다. 교회를 걱정한다. 교회는 이미 세상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미 한국교회를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8천만 복음화대성회를 열면 무엇하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 하면 무엇 하겠는가. 기독교지도자대회를 고급호텔에서 열면 무엇 하겠는가. 그곳에 하나님은 계실까. 이러한 음모 안에는 무서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말이다.

희망 없는 교회, 역사 속에서 구원의 자유와 평화를

종로5가 다윗문화인 기독교연합회관 건축이후 범죄자의 소굴로 변질
죽임당하는 이웃과 노숙자가 있는 곳,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자

하나님은 교회를 버렸다

추상적인 하나님나라운동, 가식적인 하나님나라운동을 집어치우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항상 말하듯이 마지막 때인가 보다. 마지막 때 구원의 빛을 높이 들자. 역사 속에서 구원의 자유를 힘껏 외쳐 볼 수는 없는 것인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하늘을 혼자 가질 수 없듯이 하나님나라도 혼자갈 수 없고,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해야 할 하나님나라운동은 분명해진다.

하나님나리의 척도를 돈으로 계산하는 한국교회는 돈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돈 때문에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분열되고, 여기에 상처를 입은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난다. 스스로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한다. 돈 때문에 다툼은 끊이지 않고, 사회법정에서 결론을 낸다. 변호사들만 먹여 살린다. 해마다 한국교회가 변호사비와 소송비용으로 나가는 하나님의 헌금은 헤아릴 수 없다.

분쟁을 겪은 교회는 제도적인 교단을 떠난다. 명분을 찾기 위해 독립단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힘 있는 장로, 문제의 장로 앞에 무릎을 굻고, 고개를 조아린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목사가 할 일은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중심의 신앙이 실종된 결과가 바로 이러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인본주의적인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결과이다. 그리고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결과이다.

70-80년대 군부독재정권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앙문제나, 예배나, 기도회나, 이웃을 돕기 위해서 모여도, 의식화 집단이 아닌가 색안경을 끼고 들여다가 본 때가 있었다. 반정부집단들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주목했다. 이래서 생긴 불신풍조는 국민들을 모래알처럼 흩으러 놓았고, 그리스도의 신앙공동체도 분열됐다. 당시 교회와 사회가 무서운 병에 걸려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교회는 평화를 가식적으로 포장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샬롬’은 실종시켰다. 그 자리에 힘을 바탕으로 한 ‘퍅스’가 자리를 잡았다. 또한 한국교회는 잘못된 권력과 결탁해서 교회성장에 몰두하며, 권력의 2중대 노릇을 철저하게 수행하며, 교회의 위상을 한없이 추락시켰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교회는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경쟁적으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서 십자가탑을 높이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하나님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퇴로한 없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는 순간 망해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다. 호화로운 성전에 하나님, 아니 예수님을 가두어 버렸다. 교회 안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샬롬(평화)을 말하는 교회를 찾아 볼 수 없다. 민중교회 중심으로 일어났던 평화운동과 현장목회도 돈 때문에 퇴색해 버렸다. 기존의 교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교회 역시 돈!돈!돈! ‘악마의 금전’을 노래한다.

돈에 환장한 목회자들 희망없다

지난 한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여기저기에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이벤트적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게 실컷 우려먹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왜 없는 것일까. 왜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없는 것일까. 교인다운 교인이 없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행해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오늘 개신교의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킨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보수의 가치와 힘에 의한 평화(팍스)를 말하며, 남북한의 무기경쟁을 부추긴다. 한마디로 퍅스를 노래한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 평화를 노래하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세계교회 역시 생태계의 위기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종교전쟁, 내전, 기아로 인해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침묵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술과 권력과 자본이 야합해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기독교의 전쟁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본능을 최대한 자극해서 인간사회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로 줄달음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날지 불확실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신들은 세습하면서,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세습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난한다. 심지어 대형교회의 세습을 영적계승이라며, 정당화 해주는 교단도 생겨났다.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면서 김일성 세습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에 쑥 들어가 버렸다. 대신 한국 중대형교회서 세습이 판을 치고 있다. 세습이 성경적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뇌까린다. 영적, 은혜를 내세우며, 세습을 정당화 한다. 노회와 교단에서 문제를 삼으면,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여기에다 세습을 정당화 해주는 교단까지 생겨났다. 일간지에 수 백 만원의 광고비를 지불하고 담임목사직 세습을 찬양하는 광고를 게재한다. 이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단에서 이탈해 다른 교단에 가입한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연합단체가 문제의 교단과 교회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는 단체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고, 문제의 단체와 교회를 악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합단체들은 한국교회를 대표적인 연합단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연합단체는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한 단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종로5가 범죄 집단인가(?)

이제 종로5가는 하나님나라운동의 전초기지가 아니다. 선교초기 종로5가는 가난한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던 선교현장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는 3.1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무엇보다도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독립군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6.25한국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의 장소였으며, 국사독재 정권아래서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종로5가는 민중 신학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인 동시에 통일운동의 시동을 건 역사적인 곳이다.

헌데 이런 역사적인 장소가 다윗문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현 기독교연합회관이 들어서면서, 종로5가는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과거 아픔의 역사적인 냄새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맘몬으로 상징되는 돈의 냄새만 난다. 악취가 풍긴다. 참담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 있다.

교인들은 종로5가를 배회하는 목사와 장로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는다. 이들을 향해 분열주의자, 교권주의자, 돈을 좋아하는 맘몬주의자, 반통일부의자, 반평화주의자, 명예주의자 등등으로 부른다. 이들에게 절대 희망을 걸지 않는다. 따라서 종로5가는 고소고발사건이 난무하며, 시위를 일삼는 자들로 채워져 범죄자의 소굴이라고 말한다. 혜화경찰서는 이들의 고소고발사건을 처리하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경찰에 끌려 다니는가.

한마디로 한국교회 희망 없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는데,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계셨다.

오늘 한국교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오시겠는가. 부자들이 많이 사는 강남에 오시겠는가. 청와대와 국회에 오시겠는가. 고급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선 여의도에 오시겠는가. 아니면 세습 등으로 악취가 풍기는 대형교회에 오시겠는가. 휘황찬란한 십자가탑에 오시겠는가.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며 이들의 마음에 꼭 맞도록 교회를 치장한 맘몬교회에 오시겠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친부와 친모, 계모와 계부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노숙자들이 있는 곳,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 근로자가 있는 곳에 오실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 바로 그들이 잇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맘몬을 노래한 세계는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다. 오늘 한국교회 향해서 경고하고 있는 지적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구자, 떠돌이, 병든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다. 예수님은 한꺼번에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만나는 사건, 당하는 일에서 단순히 측은해서 도운 것이 아니다. 그 행위가 바로 악마를 추방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운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다. 썩은 살을 도려내면 새살이 나오고, 물은 아무리 막아도 아래로 흐른다는 진리를 잊지 말자. 그리고 예수님이 역사의 물줄기에서 벌인 정의로운 평화(샬롬)에 참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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