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잔인한 4월 교회는(?)

한국민에게 있어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올해는 4.3사건이 일어난 지 70년, 4.19혁명 57년, 4.16 세월호 참사 4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가 이런 4월을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이라고 말하는가. 특히 한국교회는 4.3사건에 있어서는 가해자이며, 4.19 혁명에 있어서는 이승만 정권의 부역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있어서는 방관자였다. 한국교회가 슬픈 역사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잘못된 정권을 변호하며, 충견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죽임 당한 자의 ‘한의 소리’, ‘피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4월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 ‘피의 소리’가 곳곳에서 호소한다. 하나님은 죽임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죽임당한 자의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죽임을 당한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4월 죽임 당한 자의 한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여온다.

하지만 오늘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 4.3사건과 4.19혁명, 4.16 세월호 사고로 죽임 당한 자들의 ‘피의 절규’는 하늘에 사무친다. 이들의 아우성은 노래로, 연극으로, 시로, 노란리본으로, 나비로 꽃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왔다. 그러나 이들의 아우성을 듣고, 한을 풀어주려는 ‘한의 사제’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노래꾼들이 “천국이 있다면, 그 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그대로”라고 노래를 한다.

이렇게 4월은 잔인했다. 바다도 울고, 산천초목이 춤을 추며 울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이 되어, 피의 절규가 되어, 아우성 소리가 되어 하늘에 사무친다. 국민들은 이 아우성소리를 듣고, 그날을 기억하며, 행동에 나섰다. 노란리본을 만들어 추모식장에 걸어놓고, 기억나무에는 세월호 참사로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추모하는 글들이 나부꼈다. 이렇게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아우성은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한마디로 죽임당한자의 ‘한의 소리’였다. “그날을 기억하겠다. 행동하겠다”고 소리쳤다. 여기에는 단원고 학생들과 세월호 생존자, 그리고 죽임당한 아이들의 부모, 죽임당한 형, 누나, 언니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아이들도 참석했다.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를 대변했다. 그날을 기억하며, 행동하겠다는 최소한 산자의 몸부림이었다. 그날을 기억하며,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다짐문화제였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네 번째 봄이 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5명.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 4주기를 기억하기 위해 광화문을 비롯해 목포 신항, 팽목항, 안산, 마산, 예산 등 추모식이 열리는 곳을 찾았다. 종교계의 추모행사도 곳곳에서 열렸다. 추모모임은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되어 2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세월호 7시간이 밝혀진 다음 처음 맞는 봄에 열렸다. 이를 지켜 본 일부 그리스도인은 이를 ‘노란리본 악마’, ‘빨갱이’라며, 거칠게 항의한다. 이들에게는 이웃도 없었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랐다. 한국교회는 아우성치는 죽임당한 자의 ‘피의 절규’, 아우성을 듣고, 행동했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최악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는 자, 죽임당한 자의 ‘피의 절규’를 외면한 한국교회는, 아이러니 하게도 4.3사건과 4.19혁명의 가해자이며, 4.16 세월호사건의 방관자였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피의 호소를 외면했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급급했다.

피의 호소를 외면한 한국교회

1947년도에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당시 제주인구 30만명의 10%인 3만명이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희생을 당한 사건이다. 잊을 수 없다. 정부의 공식 피해자만도 1만4천명이며,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3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때도 한국교회는 죽임당한 자의 ‘피의 호소’를 듣지 못했다. 제주 4.3사건은 좌•우 이념의 대립,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제주도민 10%가 희생을 당한 슬픈 역사이다.

당시 부모의 손을 잡고, 산속에서 숨어 지냈던 꼬마는 백발이 성성해 70년이 지난 3일 추념식에 참석해 당시를 증언했다. 4.3 생존희생자와 제주도민들은 70년 동안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고 국가와 국민들에게 물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돼 95%가 불타 없어졌다.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하기도 했다. 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들이 각 분야에서 끊이지를 않고 계속되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은 일어났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천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사건의 진실을 외쳤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다. 그것은 문단에서도 계속됐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등등은 묻혀 있던 4.3을 세상으로 끌어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으로서 처음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분명히 했다.

권력의 주변을 맴돈 한국교회

1960년도에 일어난 4.19혁명이 57주년 되었다. 문득 이승만 정권의 권력 주변을 맴돌며, 독재정권에 침묵했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되묻고 싶다. 독재정권의 총칼 앞에서 어린 학생들이 죽임을 당할 때 무엇을 했느냐고 말이다.

한국기독교선교는 전제군주를 등에 업었고,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는 루터가 주창한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식민지세력에 적극 협력했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창되었다. 그것은 영미의 팽창주의와 일본식민주의가 맞아 떨어졌다. 한국기독교의 정교분리와 구원은 “곧 망할 세상이니, 나만이라도 빨리 도피해서 구원을 받자”는 민족의식을 몰각시키기 위한 방편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졌고, 선교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태도는 이기주의와 비겁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정교분리는 비겁한 자의 자기방어의 방패가 되었다. 비겁한 자들은 그 안에 안주했다. 이것은 민족수난과는 별개로 덧붙은 군살과도 같았다. 이들은 그저 교회의 몸집을 부풀리기에만 급급했다.

1919년도에 일어난 3.1만세운동은 우리민족사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석했음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기독교의 체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민족의식이 몰각되고, 민족적 현실문제에 ‘오불관언’의 자세를 계속해서 취해 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회가 그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할 뿐이었다.

그렇다. 한국기독교가 한민족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고 너는 누구냐! 이 민족의 문제가 바로 나 또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면, 민족사안에서 소외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기독교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민족사에 참여하려는,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기독교는 민족사적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기독교가 민족사적 현실에 배반하면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이기적이면서도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이 민족의 급박한 현실과 모순, 그리고 부조리에 대해서 침묵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눌린 자들을 외면했다. 대신 추상적인 ‘구원’과 ‘회개’, 그리고 ‘교회성장’만을 외쳐 됐다. 한마디로 싸구려 복음을 전파하며, 행동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라면, 언제든지 자기가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강도만나 수탈당하고, 폭력에 죽어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외면했다. 한국기독교는 스스로의 위치를 부정하고, 일본식민지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사람과 독재정권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서 소외된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 병든 자, 눌린 자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바른 길로 못가는 절름발이, 권력과 재물에 눈먼 자, 진실이 들리지 않는 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는 생명인 자기개혁의 길을 재촉해야 한다. 그것은 권위주의의 상징인 다윗문화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자기 성을 허물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 갈 때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신학자들은 철옹성 같은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라고 한다. 한마디로 행동하는 교회만이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1960년 4.19혁명 57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교회사의 주체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일 수 있는 전략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인한 4월, 생명의 계절이며, 부활의 계절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희망 없이 죽임을 당한 제주 4.3의 희생자, 4월 혁명의 희생자, 4.16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의 사무치는 ‘피의 절규’, ‘한의 소리’를 듣고 기억하자. 그리고 행동하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