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경제구조

“너희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장 19절)

하나님의 세계 통치라는 기독교의 세계화의 꿈은 예수님의 명령으로 약속된다. 그러나 이 꿈은 500여년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온 세상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경배하겠다”를 되뇌이며 인도를 향해 출발한 콜럼버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가톨릭의 세계주의에 뿌리를 둔 콜럼버스의 세계화는 유럽문명의 팽창주의, 유럽의 자본주의가 배후에 있었다. 이는 곧 세3세계를 식민주의로, 다음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이름을 바꿔가며, 수많은 문화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 또는 노예화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는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영미식 식민지를 거쳐 확장되기 시작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확장과 함께 기독교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지역에 따라서는 기독교선교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확장에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에서는 19세기를 ‘기독교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3세계에 있어서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는 ‘굴욕의 세기’ 또는 ‘일식의 역사’였다. 제3세계의 문화와 문명은 유럽의 것으로 바꾸어졌다. 오늘 한국교회가 맘몬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90년 구소련이 붕괴됐다. 동구권이 해체됐다. 동서 냉전체제도 종식됐다. 그러자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화가 완성됐다고 선언했다. 레이건의 이 말은 세계화의 완성은 자본주의 문명이 지향하는 인간의 자유, 아니 시장(맘몬)의 자유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민족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맘몬의 두 손인 자본과 시장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서 무한한 자유를 구가한다. 돈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나 제한 없이 장사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수많은 체인점과 다국적기업들이 들어와 장사를 하고, 엄청난 돈을 빼 나간다. 우리나라의 기업도 미국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장사해 돈을 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미국의 거대기업이나, 거대자본에 맞서 경쟁할 수 있겠는가. 오늘 한국교회서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도, 갑질을 하는 GM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시장과 자본의 자유는 강한자의 자유, 경쟁할 수 없는 약한자의 제약으로 다가온다.

레이건의 세계화 배후에는 콜럼버스에 의해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결합시킨 기독교적 세계화의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영미의 이러한 식민주의와 선교의 결합은 이미 19세기 중엽 미국의 인디언을 개종시키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은 동서 냉전체제의 시기에는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구도로 사용되었다. 신학적으로 기독교 유신론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유물론으로 비판했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체주의적 독제체제로 공격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 붕괴를 자유민주주의 승리로 끝난 기독교 세계화의 완성으로 보려했다.

 

 

자본주의 새로운 질서 평화의 질서가 아니라 약탈의 질서
기독교와 맘몬의 결합이 낳은 세계화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가

세계화 인간에게 행복을 주었는가

그래서 기독교의 세계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적 공산주의가 붕괴되면 세상은 진정한 평화가 증명되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맘몬의 결합으로 낳은 오늘날의 세계화가 정말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가 주었는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는가.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변신한 오늘날의 자본은 노동자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었고,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이런 비정규직 노동제도와 근로자 파견제의 대기업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세계화의 결과이다. 김영삼 정부 아래서 일어난 IMF는 노동자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었고, 김대중 정부 아래서 강력하게 도입된 신용카드 남발은 400만명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나타난 세계화의 결과이다. 맘몬과 기독교가 결탁한 결과이다. 맘몬은 성서의 인신 제사를 강요하는 몰록신과 같다.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경제난은 이혼, 가정파괴, 청소년들의 이탈, 청년실업률 급증, 자살 등으로 이어져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한국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극명해진다. 자본의 신 맘몬, 인신제사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경제 질서라는 살인의 몰록신으로부터 기독교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몰록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했다. 금융자본주의라는 맘몬의 신, 인간을 살해하는 몰록의 신이 시장경제질서라는 자신들의 먹이사슬 체제를 만들어 매년 수천만명의 굶주리는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기독교가 맘몬의 우상숭배를 계속하는 한 하나님의 신판을 면 할 수 없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라. 신의 자리를 ‘맘몬(돈)’으로 대치시키지 않았는가. ‘구원’이라는 이름아래 헌금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한국교회는 헌금의 액수가 하나님나라의 척도가 되지 않았는가. 헌금을 많이 드려야만 장로도 될 수 있고, 총회장도 될 수 있고, 노회장도 될 수 있다. 이단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혼자 가질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갈 수 없다. 이웃과 함께 가야 한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함께 가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아니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전쟁의 신에서 사랑의 신, 자비의 신, 생명의 신으로 선포해야 한다. 서구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대부분 기독교가 원인이었다. 지금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대부분 종교전쟁이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쟁과 약탈의 신으로 만든 것은 서구 기독교의 왜곡이다. 특히 18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의 신민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건 침략과 약탈이었으며, 여기에 많은 국가들과 종족들이 식민지 종속국가로 고난을 당했다.

그 이전의 전쟁들도 마찬가지이다. 콜럼버스는 이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모든 민족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기도를 하며, 아메리카로 건너가 인디언들을 살육하며, 기독교를 뿌리내리지 않았던가. 또 8세기 카롤 대제의 선교전쟁, 이슬람 무역상과 베니스상인들의 강등을 등에 업은 11세기 십자군전쟁,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제1.2차 세계대전 등의 전쟁들은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평화의 질서(?) 약탈의 질서(?)

미국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는 평화의 질서가 아니다. 약탈의 질서이다. 9.11테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시각과는 달리, 미국자본의 아랍권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세계 경제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라크 전쟁 역시 기독교 세계와 아랍세계를 분열시켜 평화가 아니라, 반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랍권의 끊임없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향한 도전 등은 그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이제 세계는 종교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맘몬과 바벨을 숭상한 나머지 경제전쟁도 예고되고 있다. 이미 경제전쟁과 종교전쟁, 그리고 인종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특정 국가와는 달리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 종교사회이다. 한국 땅에서 가톨릭은 230년, 기독교는 130년의 역사를 가진 어린 종교이다. 전통종교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나름대로 역사와 문화발전,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도덕적 함양에 기여해 왔다. 이런 전통종교에 대해서 개신교는 매우 적대적이며, 전투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다. 기독교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적대적이다. 이미 기독교내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기독교 내부의 전쟁이 예고되고 있다.

가톨릭은 문화상대주의 정책을 통해서 타종교에 대해서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톨릭은 기독교에 비교해서 이웃을 사랑할 줄도 안다.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 온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을 비롯해 쌍룡자동차 해고노동자, 음성 꽃동네 등을 찾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로마교회 500년과 부패한 유럽 기독교 1000년을 기독교 언론을 통해 비판하기에 급급했다. 이 때 기독교인 수십만명이 천주교회로 넘어갔다.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경색되었던 남북한에 춘풍이 불어오고 있다. 이번 달에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만나고, 다음 달 북미정상회담에 예정되어 있다. 또한 남한의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이 북한을 방문해 예술교류도 가졌다. 이렇게 남북한에 춘풍이 불어오고 있는데, 한국개신교는 경직된 반공주의와 전투적 선교 이론을 가지고 계속해서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목회자들의 입에서 전쟁을 하자는 소리까지 나온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가 사랑의 복음을 통한 남북분단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북한정권을 붕괴시키고, 거기에 기독교를 이식하자는 19세기적 제국주의 선교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분단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던 만큼, 한민족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해야 한다. 선교 역시 남한만의 선교도 아니고, 북한만의 선교도 아닌 한민족 전체의 선교를 말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남북한 민족 모두가 가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형태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한국교회의 깊은 곳을 보면, 하나님보다 맘몬을 섬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잘못된 물신숭배의 승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의 한국 개신교는 야훼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하는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제 결단하자.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맘몬의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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