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 언 근 목사

하얀 모시적삼을 걸치고 산 중턱에서 꾸물꾸물 무언가 채취하는 老 牧師님의 모습을 보면서 오다가다 동구 밖에도, 집 앞에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나물을 두고서 머∼얼리 산 중턱까지 올라 나물캐는 老 牧師님을 보고서 궁시렁 거리는 촌노들의 이야기 인즉. 마을 앞 교회 老 목사님께서 집 앞에 있는 나물은 바쁘게 일하는 여집사님들과 동네 아낙네들이 오며 가며 뜯어 밥 반찬 하라고 당신은 멀리 산 중턱까지 가서 나물을 채취한단다. 이 분이 바로 우리들이 만나보고 싶은 목사가 아닌가?

성도들의 피까지 깨끗이 빨아치우는 현대교회의 목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목자는 어디에 있을까?

자동차를 운전한 지가 30년도 넘었는데 3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여유있게 다녀본 적이 없이 그저 자동차는 쌩쌩 달려야 제 맛이고 제 멋이듯 규정 속도를 위반해 가면서 달리다가 앞을 가로막는 규정 속도 차량을 보면 왜 주행선으로 가지 않고 추월선에서 규정 속도 준수하느냐고 궁시렁 거리다가 신경질까지 내는 때가 다반사이다.
계속 스케줄이 잡히면 순식간에 수천키로를 달리고 기진맥진 한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모습이 몹시도 안타깝고 못 견디게 싫으셨는지 갑자기 요통이 심하고 걸음도 기침도 할 수 없이 허리가 고장이 났다.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수 없어 약 2시간의 여유를 두고 출발했다. 요통 때문에 천천히 여유있게 운행을 하면서 時間的 여유도 남에게 수없이 베푸는 것이구나 싶었다. 왜냐하면 트럭, 탑차, 냉동차 등등이 생업을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이 고속도로 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새까만 새단들은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맹 질주하다가 뒤로 물리고 물리고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내 달린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준다”면서 예수의 이름을 선물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금과 은 없지만 여유있는 시간을 만들면 얼마든지 생업 때문에 내달리는 저 수많은 트럭과 물품 운반차량에게 빈 자리를 내 줄수 있는데 왜 30년이상 한결같이 내달리며 옆차들과 경주하고 눈을 부라리고 궁시렁 거렸을까?

반나절을 요통 때문에 뒹굴다가 결국 고속도로 상에서 母情같은 목자의 마음이 없었음을 회개한다.

이제야 철이 드는가 보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나 보다.

앞서가려는 자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철든 사람으로, 은혜의 사람으로, 老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보리라 다짐해 보지만 며칠이나 갈까 싶다.

5월 10일 정오경 침몰 후 누워버린 세월호가 바로 서는 날 나도 바로 서야겠다.

그 무수한 세월들을 낭비하고 살아왔으나 이젠 똑바로 서서 진실을 규명하려는 세월호처럼 차근차근 쉼 없이 뚜벅뚜벅 천천히 여유있게 진실의 삶을 살아보자꾸나.

없는 것으로 나누려고 안간힘을 쓰기 보다는 있는 것을 나누는 철든 삶을 구사해 보자꾸나.

철들지 못한 세월이 어찌 그리 많았던가! 허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철이 들게 하시는 그 분의 섭리 앞에 두 무릎 꿇어 경배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세월호도 바로서서 진실만을 말하는 시간들로 물꼬가 트이길 기대해 본다.

왜냐하면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이들 때문에 한 맺힌 이들이 너무 많기에....

빌딩숲에 가려진 음지에서 얼어죽은 이들이 너무 많기에...

나만이라도 그짓을 말자꾸나.

한민족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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