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되고 있는 효의 사상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 성서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세상 사람들은 묻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라고 해서 부모를 공경하며, 아름다운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급속하게 변하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어르신들에 대한 ‘효의 사상’이 실종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를 거친 우리의 가족제도는 또 개인중심의 가족제도로 분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효의 사상’은 실종되어 가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한 부모를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땅의 부모들도 수명을 다한 이조시대와 일본 식민지시대, 6.25한국전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어머니는 길쌈해서 자녀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고, 아버지는 논사를 지어 생계를 책임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유교에서도 웃어른에 대한 ‘효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 모 기관의 의식조사에서 청소년의 74%가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고령화시대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의 노인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학교를 비롯한 교회 등 교육기관에서의 ‘효의 사상’에 대한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일부 교회가 ‘효의 사상’을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교인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요양원을 비롯한 노인대학, 노인잔치, 반찬배달 서비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 노인들의 윤택한 삶을 지원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제사제도를 우상숭배로 거부하면서, 국민들로부터 ‘부모도 모르는 종교’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받고 있다. 일부 교회가 노인복지에 참여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인식을 불식시키고, 고령화되어 가는 오늘의 한국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선교정책에서 나왔다. 또한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교회 성장의 동역을 마련하고, ‘효의 사상’을 일깨워 주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면서, ‘효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이를 망각하고, 바쁜 생활을 하며 효의 사상을 실종시켰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찾아뵙지 않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비소를 보낸다.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도 못하면서, 교회는 왜 나가냐”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기독교인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같은 교인이 보기에도 심할 정도로 부모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이웃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서 주일날이면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가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말하는 회개이며, 신앙이고, 복음이다. 이러한 가식적인 모습은 한국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시켰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있는 교인들도 교회를 떠난다. 스스로 자신이 기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웃어른을 섬기는 우리 전통의 제사제도를 거부하며, 이를 미신으로 치부한다. 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제삿날을 여러 가지 핑계로 불참하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가족들이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평등의 생활공동체가 깨지는 이유다. 오히려 가정불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이것은 부부간의 이혼, 별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도 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효의 사상’을 실종시키는 주범으로 오해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 기독교인은 이웃들로부터 “부모님도 모르는 교회를 다녀서 무엇하냐”는 말을 듣는 경험을 한번쯤은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은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정 짓고, 마치 기독교의 신앙을 지킨 것처럼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받는 비소에 대해 마치 자신이 핍박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가족들의 대소상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부 목회자는 교인들이 중추절을 비롯한 설날, 제삿날 등 아예 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일부 교회와 기도원은 중추절과 설날을 기해 특별집회를 갖는다.

대형교회 중 하나인 구로구의 Y교회는 중추절과 설날에 꼭 특별집회를 열고 있다. 마치 특별한 날 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또 가족들의 모임을 ‘마귀들이 우글거리는 모임’으로 규정짓고 있다. 교인들이 이웃들로부터 부모형제도 모르는데 교회는 왜 나가냐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일부 교회의 이 같은 형태의 선교는 가정불화를 일으키고, 심할 경우 가정해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천주교는 한국에 처음 건너와 문제가 되었던 제사문제를 쉽게 풀었다. 로마 교황청에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고, 제사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제사문제에 대해 한국의 정통문화로 해석해 문제를 풀어 주었다. 한국교회가 유독 제사문제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천주교와의 차별화하겠다는 편견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가족모임, 사탄의 모임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라는데 문제가 없다. 또 이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면 큰 죄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사회와 국가에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의 권한을 부모에게 완전히 위임한 것이다. 결국 부모는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기독교는 일부목회자와 교인들의 잘못된 교육과 행동으로 인해 ‘부모도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일부교회 목회자의 잘못된 생각은 한국기독교를 ‘효의 사상’이 결여된 단체로 보는 편견을 갖게 했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결여된 ‘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를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는다. 이것은 일부 교인들의 실종된 ‘효의 사상’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교회 전체가 효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교회 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단체도 없다. 실종되는 ‘효의 사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대학원까지 생겼다. 십계명 중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일 정도로 기독교와 효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교의 ‘효의 사상’보다도 더 강조하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오정성화교회(담임=이주형 목사)는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초청잔치를 80회에 거쳐 실시했다. 이 교회의 정기적인 노인잔치는 교인들에게 효의 사상을 심어주고, 노인들의 황혼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수시로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인대학과 효도관광도 실시, 교회성장의 토대로 삼고 있다. 교인들이 떠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 교회 만큼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군산시에 위치한 중동교회(담임=서종표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이 교회의 노인대학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국내 유명관광지를 안다녀 온 곳이 없을 정도로 효도관광을 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건강이 허락되는 어르신들은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다. 이 교회 담임인 서종표 목사는 자신이 부임하는 교회마다에서 특별한 노인선교정책을 펼쳐 주목을 받았고, 이를 모토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노인선교정책 교회성장의 원동력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효의 사상이 실종된 단체로 낙인 찍혔다. 그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설날을 비롯한 중추절 등 가족들의 대소사의 모임을 마귀들의 모임으로 규정짓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표징으로 여겨 온 제사를 거부하고, 이를 우상숭배로 단정 짓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살아 계신 부모님을 모시는데 있어서도 주일예배 등의 핑계로 부모님을 찾아뵙지를 않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탈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교인들 중 부모님을 학대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이들이 모처럼 할아버지·할머니 곁이라도 가면 마치 벌레 옆에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로 막는가 하면, 폭언·폭력 등을 일삼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랑의 종교’이며, ‘효의 종교’로 알려진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일반인들은 “저것이 무슨 교인이냐(?)”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 ‘선교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성서의 중심사상인 ‘사랑의 정신’과 ‘효의 사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한마디로 성서가 말하고 있듯이 효의 실천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어르신은 정당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약속한 계명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모’란 자신을 낳아 준 부모뿐만 아니라, 자신을 있게 한 조상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효의 실천은 하나님의 명령임에는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의 대표자로 가정에는 부모, 학교에는 교사, 교회에는 교역자, 국가에는 통치자, 기관에는 책임자를 세웠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라는데 문제가 없다. 또 이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면 큰 죄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사회와 국가에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의 권한을 부모에게 완전히 위임한 것이다. 결국 부모는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성경은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교훈하며, ‘효의 사상’을 가르쳐주고 있다. 바로 효의 사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구절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4~25)”,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로새 3: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태복음 19:19)”,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레위기 19:3)” 등등 그럼에도 한국교회 안에서 ‘효의 사상’이 결여되고 있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서의 말씀대로 살지를 않고, 조상에 대한 예를 우상숭배로 터부시하고, 이것도 모자라 조상에 대한 예를 위해 모인 가족들을 마귀집단으로 매도하는 등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부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교회는 국민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말하는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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