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예수님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지를 않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헌신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아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인 이들의 신앙공동체이다.

장로가 되어 특권을 누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자들은 결국 교회를 파괴한다. 교회는 자기 욕심과 주장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우리의 몸까지 바치는 곳,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이다. 우리의 삶의 원천이며, 목적인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성서는 “유대사람이든, 헬라사람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한 성령으로 …… 한 몸이 되어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한 공동체가 되어 살았다. 과거 이렇게 살면, 잡아다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감옥살이를 했던 시대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대로 살아보겠다고 평등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과는 감옥에서 고난당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 심플리키우스는 교회 수입의 4/1을 가난한 자들에게 쓰도록 규정했다. 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빈민층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 행위를 반대했다. 귀족들과 맞섰다.

결국 7세기에 이르러서는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교회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고리대금 행위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수탈방식의 하나였다. 그렇다. 교회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봉사와 노력이 교회의 선교에서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가 부자교회가 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등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의 본래 선교사명을 망각하고 타락해 가는 중세교회를 향해 대담하게 교권을 거부하고,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다. 만인사제설은 성직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고, 모든 교인이 성서를 자유롭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목사들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설교, 성례전, 성서교육을 책임진 전문적 교역자라는 것이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는 개인주의적 사상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상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는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어서 개인들이 의미 있다고 본다. 신약성에서도 교인들이 개인으로서 부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름을 받았다.

처음 한국교회는 주로 수명을 당한 이씨 조선에서 고난당하는 하층민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이들과 함께 교회를 성장시켰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중산층들을 위한 교회가 되었고, 하층민들은 여기에서 탈락되었다. 국민들 중 빈민층과 노동자계층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의 선교를 지원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교회의 예산중 4/1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참 교회이다.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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