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목사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무조건 따랐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님이 무조건 좋았고, 예수님은 이들의 삶의 현장에 있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 다녔던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파리새들이 내세운 체재와 계율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2일치 식량을 준비해야만 했다. 하루 일해서 하루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 수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는 “형제들이여 당신들의 소명을 보시오 육에 의해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으며, 권력자나 명분출신이 많지 않았습니다”(고린도전서 1장26절)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로운 자에 대해서 미천한 자 △강자에 대해서 약자 △명문가 출신에 대해서 미천한 자를 생각할 수 있다. 초창기 교회공동체는 기존체재에서 볼 때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모인 공동체였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신분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의 신분 전체를 나타낸 말이다. 기원후 그리스도 비판가의 선구자인 첼수스(178년경)는 “그들은 문화인 지식인들에 대해 악의를 품고, 배우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만 모아놓고 교회를 만들고 있다. 그들의 생업을 보면, 대게 양털깍기, 신발수리, 세탁업 같은 것으로서, 상놈들이다”고 지적했다. 그리스의 문인과 대조시킨 것이다.

첼수스의 눈에는 저들이 보잘 것 없는 계층이었다. 바울도 이 그리스의 지혜, 아니 그리스의 철학적 사고를 알고 있었다. 그것과의 논쟁과 변증에 모든 역량을 결집시켰다. “지혜 있는 자가, 학자가 어디에 있느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18-25절)고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도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장 1-5절)고 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선택받은 사람이다. 처음 한국기독교의 선교도 농촌에서부터 도시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네비우스 선교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연세대학교 백낙준 교수는 “한국교회의 참교인은 농촌에서 일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농부이고, 농촌에서 이들을 섬기는 목회자가 참 목회자이다”고 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이 땅의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 신분적으로 비천한 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역사의 주인공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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