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인해 한반도 전역에 평화의 훈풍이 불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 예언자 전통서 출발

남북한 민족 모두는 전쟁을 거부한다. 전쟁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남북한 민족 모두가 공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북한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한반도의 비핵화와 한민족의 화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내용의 ‘판문점선언문’을 발표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남북한 민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북미 정상들이 싱가포르 만남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남북한 민족은 분단 이전부터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땅에서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한 번도 해 보지를 못했다.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서 남북한이 분열되고, 정권을 탐하는 자들에 의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망해가는 이씨 조선의 말을 보는 듯 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변강대국들이 적대적인 발언을 계속하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사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민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집권층, 또는 교회내부에서 거세게 일어 왔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국제관계를 측정하고, 국내적으로 힘의 균형 등 역학관계를 측정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실리를 분석함으로서 비로소 내려지는 결론이다. 따라서 그러한 분석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교회와 민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나, 민이 통일문제에 관여하면, ‘국론분열’ 등을 운운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을 철저하게 막았고, 교회 역시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 그리고 교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 교회 역시 우리의 과제는 선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일과 평화는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통일과 평화의 문제, 민족화합의 문제는 교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위해 허공을 치는 기도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행동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교인들로부터 북한선교헌금을 거두고 있다. 이것은 제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의지를 전혀 보여주지를 못하는 것이며, 어떤 과정으로나 통일된 다음에 그곳에 상륙해, 선교사들이 남한에 이식시킨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북한에 이식시키겠다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전면에 나서 평화를 위한 포럼 등을 개최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고, 받아드린 영미의 신학은 한국교회를 자신의 게토에 감금해 버렸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사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 게토에 감금되어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성경적 평화로부터 멀리 있었다. 사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샬롬을 외치기보다도, 힘에 의한 팍스를 외치며, 반공주의와 승공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선교개념이 전도라는 개념과 일치시키려는 데서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시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케 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개념으로 착각했다.

“집단의식•관념 등의 구조악과 싸워 이기자”

한민족의 화해,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절댑적 주권’에 속한 것
남북한선교 구조악과 싸워 이기는 것

그래서 선교초기부터 한국교회는 고난당하는 민족의 역사와 유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 한국교회는 통일과 평화, 민족화해의 문제는 다른 누가 할 일이고,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에 가서 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한국교회가 할 일이라고 착각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북한선교를 한다는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은 성경책을 비닐봉투에 넣어 두만강 변에서 북한을 향해 던지고는 북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말한다. 남북한의 선교는 죽음의 직전에 있는 남북한 민족이 함께 사는 것은 분명하다.

선교는 예수님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고 천당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있는 이웃을 살리는 것이 선교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구원’과 ‘천당’, ‘복음’, ‘성령’ 등 초기한국선교사들이 한민족의 역사와는 유리시키며, 전한 싸구려 복음을 그대로 외치고 있다. 선교는 관념과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구조악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며, 소외된 자들의 인권회복이다.

하늘은 혼자 가질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혼자갈 수 없다. 특히 남북한의 선교에 있어서, 북한만의 선교, 남한만의 선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한민족의 선교는 남북한민족은 물론, 세계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남북한민족을 비롯한 한민족 모두가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위해서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노래해야 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민족 선교를 위해서 통일문제에 관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 전통과 남유대 전통 두 주류가 있다. 북이스라엘 전통은 출애굽 전 전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민에 바탕을 둔 이른바 계약전통이다. 또한 해방전통이다. 가나안 정착 시 부족공동체를 계승한 것이다. 부족동맹의 특징은 왕권이 없는 협의체적 공존체제이다. 왕권이 없다. 중앙집권체도 아니다.

부족동맹은 신분적 지배자가 없었다. 유사시 카리스마적 인물이 등장해 위기를 타개하면, 평민으로 돌아간다. 상설 군사체제도 없었다. 유사시 모두가 방위체제에 나섰다. 그것은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의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 즉 어떤 제도적인 것이 하나님과 인간, 지휘관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가나안 주변국의 왕권체제 수용을 추진했다. 강력한 지배체제로만 나라가 부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를 반대한 사무엘은 항변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엄한 계시로 선포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 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사무엘상 8장 11-18절)

이 성경구절은 출애굽 계약전통에 바탕을 둔 부족동맹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왕권수립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싫어 배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것이다. 또 출애굽 전통과 부족동맹정신을 거부하는 하는 것이다. 처음 왕으로 추대된 사울까지만 해도 부족동맹의 바탕 위에 있었다.

남북문제 예언자 전통으로 해결해야

왕으로 추대된 사울은 전투사령관 이외의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통치역역도 분명하지 않았다. 다윗 왕이 들어오면서, 왕권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윗은 블레셋의 사령관으로 임명돼 이스라엘과 대결하기도 했고,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북이스라엘을 유대지역에 통합했다. 예루살렘 성읍을 빼앗아 개인영지로 만들었다. 그 곳에 거대성전을 만들어 법궤를 그 곳에 고정시켰고, 신을 성전에 가두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또 유대의 왕으로 추대됐다.

그는 이스라엘 전통신앙을 빼앗아 감금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어디에도 야웨 신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았다. 외적으로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과 유대가 통일된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남북의 분열을 구체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출애굽 전통에 선 북이스라엘의 신념과 다윗왕조 유대 중심의 체제주의로 갈라놓았다. 그는 메시아사상 마저도 다윗의 후예라는 이론까지 펼쳤다.

유대지방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지방과 그 주민들을 이단시하며, 상대하지 않았다. 갈릴리 일대를 ‘이방인의 땅’, ‘버려진 땅’으로 간주했다. 유대 땅의 심장은 예루살렘이었다. 여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상징이었다. 그것을 빼앗아 독점함으로써 그 우위론의 근거로 삼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며 살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도, 이 정통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결국 팔레스탄 등 중동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무대를 갈릴리로 정했다. 그곳에서 율법과 관념, 집단의식 등 사단과 싸웠다. 한민족에게 있어서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저해하는 관념과 집단으로부터의 해방, 이러한 구조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한국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열이, 곧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주지해야 한다.

한민족의 분열은 민에 의해서 분열된 것이 아니다. 정권야욕을 가진 집권계층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한반도의 분열은 국제정치 장난의 산물이다. 남북한이 민을 생각하고, 민의 자세를 견지했더라면,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분열을 장난치지 못했을 것이다. 분단 70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한민족의 화해를 위한 행진이라는 말도 안 나왔을 것이다. 70년 동안 한민족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 왔는가.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군사력과 통치체제 강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남북한은 지난 70년 동안 분단이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국민들을 억압해 왔다.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한 것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은 남북한민족사이의에 깊은 상처를 가져다가 주었다. 또한 그것은 남북한민족 상호간의 절대불신의 계기도 만들었다. 분단 73년이 지난 오늘, 남북한이 평화의 길로 가려는데 너무나 힘든 것이다. 곳곳에 장애가 있다.

민에 의한 통일, 민에 의한 한반도의 평화, 민에 의한 한민족의 화해는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화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이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반통일적이며, 힘에 의한 평화(팍스)를 말한다. 통일과 평화를 말하는 이들을 향해 “정치적인 것에 관여 하냐”고 말한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군사력에 의한 경제적 출혈을 막는다면, 남북한민족이 화해하고, 평화의 길로 간다면, 그것은 경제난국의 해결의 열쇠이며, 동시에 우리가 갈망해온 새로운 나라 실현의 열쇠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새로운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팍스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버려진 땅, 척박한 땅, 갈릴리지방에서 가난하고, 미천하고, 천박하고, 병자, 장애인, 떠돌이, 창녀, 세리 등과 실현한 하나님나라의 샬롬(평화)를 이 땅에서 실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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