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한 교회

올해도 어김없이 7월, 법의 달은 찾아왔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법이 몇 사람의 기득권자와 권력자를 위해서 악용된다면, 그것은 법의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했다. 그렇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법이 일부 권력자와 기득권자를 위한 법이 되었다. 우리는 해방이후 군사독재정권과 독재정권 아래서 이를 경험해 왔고, 경험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옭아매는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맞섰다.

구약의 신명기법전(신명기)과 계약법전(출애급기), 성법전(레위기)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떠돌이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법전이다. 문제는 사람을 위한 법이 소수의 권력자와 기득권들이 악용되어 왔고, 악용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성서의 법정신이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살아 그대로 지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리사이파의 안식일 법을 그대로 적용, 교인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종용한다. 만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이라도 가는 것처럼 설교하고, 교육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또한 정결법도 교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은 정결법과 안식일법과 맞서 싸웠다.

법의 보편적 가치는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평화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법의 보편적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지키지 않는 종교단체로 낙인이 찍혔다. 그것은 교회의 재산이 많아지고, 기득권세력으로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회분쟁이 갈수록 증대되고, 세상 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자신들이 만든 법도 부정하는 상황이며, 예수님을 교리화 시켜 버렸다.

임시목사 청빙을 둘러싸고 당회와 교인간의 다툼,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다툼, 담임목사 세습을 둘러싸고 교인과 원로목사의 다툼, 교회내 기득권세력과 비기득권 세력 간의 다툼, 재정비리를 둘러싸고 목사측과 교인측간의 갈등, 교단과 교회간의 다툼 등등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인 교회가 갈등과 다툼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다툼은 교회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한국교회의 중심이었던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기득권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종교단체로 변질되었다. 교회내 다툼은 기득권자들끼리의 세력 및 헤게모니 싸움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싸움이 교회의 법의 테두리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다툼의 문제는 사회법정으로 끌고 가, 사회법정의 판단에 의해서 해결되고, 해결되어 왔다.

이미 한국교회는 내부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어버렸다. 문제는 교회의 재판이 끝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년 동안 계속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오늘 한국교회의 내놓으라는 사랑의 교회를 비롯한 서울교회, 명성교회, 목양교회, 두레교회, 성락교회 등을 보면,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같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다툼은 선교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
교회의 분열과 교파주의, 이미 교회 내 다툼 예견하고 갈등의 원인 제공

교회의 다툼 이미 예견된 것

영미교회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한국에 이식시켜 놓은 한국교회는, 내교회, 우리교회라는 집단의식과 교파의식이 뿌리깊이 내린 결과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분열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한마디로 분열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할 곳에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성서의 법정신과 기독교의 가치, 그리고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요즘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의 봄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영미 선교사들의 산물인 교파주의를 북한에 그대로 이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반통일적이며, 예수님의 반평화적인 모습을 보여 온 한국교회가 오늘에 와서 북한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그대로 들어내 보이고 있다. 본지를 비롯한 일부 목회자들은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족족의 화해를 촉구해 왔다. 이것은 예수님의 법정신인 정의, 평등, 평화, 사랑을 실현하라는 선교의 명령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성서의 법인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삶과 가치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법’을 지키거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선교초기의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교파주의를 그대로 북한에 이식시킨다면, 북한교회 역시 분열과 갈등의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툼으로 이어질 것이며, 북한교회 역시 다툼에서 벗어나지를 못할 것이다.

그래서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남북한 민족이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일 것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교회는 분명 성서의 법정신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과 정의, 평등과 인권을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목회자이며, 교회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특히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서, 법과 질서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했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권선언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통일 등의 양심의 소리를 냈다가 투옥되었다.

그것은 법이 국민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의 정권 연장을 위해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빨갱이’, ‘용공’으로 매도했다. 한마디로 통일운동이 일부 특정정치인과 정부의 점유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들은 분단의 문제를 비롯한 민주화 등 모든 문제가 분단이 가져다가 준 것이라고 판단하고, 민에 의한 통일운동에 참여하며, 고난을 자처했다.

오늘도 한국교회는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이라도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철저하게 독재정권의 최대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일본식민지세력의 권력에 순응할 것을 교육하고,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켰다.

한마디로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의 보편적 가치를 상실케 했다. 심지어 출애굽기를 읽지 못하도록 했으며, 민족의 작은 희망을 빼앗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사회법과 자신들이 예수님을 교회화시켜 만든 교회법을 잘 지킨 것도 아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바울의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말을 인용, 교인들로 하여금 무조건 복종케 했다.

성서의 보편적 가치인 법정신 실현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가야 한다. 남한민족만 가는 곳도 아니다. 남북한민족이 함께 하는 곳이다. 그것은 법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와 평등, 평화와 사랑을 실현할 때 비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성서를 가치를 잃어버리고, 독선과 아집에 묻혀 분열과 갈등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일 이전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 평등, 사랑, 인권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성서의 법정신을 상실했다.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들의 정서에 맞는 교회당을 건축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장애인 등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부하던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의 법정신에 가치를 두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법정신을 따르며, 이들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일이 되어야 한다. 오늘 교회가 이들에게 안식일 법을 적용해, 이들을 구속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교회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간진 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 힘을 쏟고 있다. 이는 결국 교회 내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 대부분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목회자들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교회내규를 비롯한 규칙, 심지어 헌법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을 교리화시켜, 교인들을 여기에 옭아매고 있다. 이는 결국 교회내 다툼으로 이어져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뿌리 채 흔들어 놓고 있다.

오늘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교회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사이 교회는 갈수록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사회적인 영향력도 크게 상실했다. 교회와 목회자, 개신교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또한 개신교선교의 가장 큰 가치인 전도의 문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만큼 좁아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가난한 교인들은 바리새적인 교회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제 개신교회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상한 집단,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 거짓말을 일삼는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에 아무도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것은 개신교가 교회내 기득권자, 정치꾼, 가진자들의 관념과 집단의식의 구조악으로 인해 개신교는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히려 분쟁으로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인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계속해서 한국개신교회가 교회분쟁을 방치한다면, 복음전파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것은 뻔하다. 가뜩이나 교인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의 교회의 탈법과 분쟁은 기독교선교에 방해만 될 뿐, 교인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이 되지를 못한다. 이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성서로 돌아가 예수님의 법정신과 구약성서의 법정신을 이 땅에서 실현하라는 것이다.

많은 중대형교회 분쟁에 휘말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법을 지킬 수 없는 빽 없고, 힘없고, 미련하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나라운동이 아닌가.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법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맞서 싸우지 않았는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은 분명 이들을 위한 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을 바리새적인 사람들이 악용했다. 이 대목에서 선교초기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소개한다.

“한국인들은 교회의 생쥐들처럼 가련하고, 개들처럼 게으르고, 돼지들처럼 더럽고, 늑대처럼 탐욕스럽고, 그들은 거의 일하지 않고 쉰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는 칭찬할 것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갈구한다. 그들은 그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은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아펜젤러를 비롯한 조선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따라 천박하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노력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식민지세력에 항거했고,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을 향해 개혁을 요구했으며, 남녀평등의 사상을 구현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가치이며, 오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한국개신교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교회 분쟁의 이면에는 돈과 권력(교권), 명예와 쾌락을 쫓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교회 분쟁이 농어촌교회나 도시의 미자립 교회가 아닌 돈과 권력, 명예를 가진 대형교회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대형교회 목사가 비자금을 형성, 이 비자금을 관리하던 장로가 죽임을 당했다. 이는 법 이전에 양심과 결부되어 있다. 법보다 더 귀한가치를 가진 것이 바로 양심이며, 도덕이고, 윤리이다.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교회 안에서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면서, 애급에서 종살이하면서 처절하게 당했던 자신의 백성, 여성들을 기억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 성서의 법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 모습은 이제 염증이 느껴진다. 교회 내에서 이제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고, 천박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설자리는 없다. 그것은 교회가 성서의 법정신을 상실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교회내의 다툼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성서의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했다.

사실 시골의 노인 몇 명이 출석하는 조그만 교회나, 혹은 교인들이 몇 안 되는 도시의 미자립교회가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도시의 대형교회들 중에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교회가 적지 않다. 대규모의 부동산 등 수많은 재산을 두고 분쟁이 야기되는 사례, 교회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면서 땅 값 상승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교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한 사례 등등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빼앗아버린 나머지 사이비화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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