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교회사적, 민족사적 의미

3.1만세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 민족해방운동,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 교회사적, 민족사적 큰 의미를 갖는다. 3.1만세운동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고난 받는 민족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은 존속되어 왔다. 한민족에게 선천적으로 민족애가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3.1만세운동이 피식민지의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와는 다르게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교회의 기념행사는 행사를 위한 행사에 맞추어져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천도교보다도 기독교가 동원력에 있어 매우 유리했고,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세상을 갈망한 결과,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우리는 3.1만세운동의 주체인 이 땅의 기독여성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당시 한국교회는 남성들에 비교해서 여성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남성지배체제에서의 억압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자신의 해방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 직접 관여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수천명, 전국에서 1만여명의 여학생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기생을 비롯한 기독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해 희생을 당했다. 이들 중 체포되어 기소된 자들이 587명이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29명이었다. 이들은 생명의 담지자 민족의 어머니었다. 이화학당에서만 28명이 검거되어 유관순을 비롯한 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배화, 호수돈, 정신, 숭의여학교 등의 기독교여학교에서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고, 여성 민족운동가들이 속속 나타났다. 또한 여기에 기생을 비롯하여 보부상, 백정,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에 참여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분명 한국교회는 선교초기 이들을 향해 복음이 전해진 만큼, 은폐된 이들의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에 나서야 하는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이다.

3.1만세운동은 민족운동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서양의 근대문명과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피억압민족의 해방이라는 출발점과 과제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억압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다. 특히 기독교 민족운동이 그러했다. 그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피식민지인 다수가 유럽인들, 미국인들을 선망하고, 자신의 민족을 방치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결국 친서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로 이어졌다. 많은 지식인 민족주의자들이 일본 식민지세력에 힘없이 넘어졌다. 오늘 한국교회가 영미의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고집하는 이유도, 영미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이데올로기적인 신학과 신앙 그리고 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친서양적인 민족의식은 결국 처음부터 자기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 자유를 박탈당한 한민족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고난당하는 한민족 서양기독교를 매개로 하나님을 만날 이유 없었다
영미선교사 대부분 한국민족 아픔 몰각, 피압박민족 자발적 민족운동

이는 1938년 총독부 주도의 조선기독교연합회 조직의 명분론이 되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제3세계국가의 선교에 있어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에 2번 걸쳐 열린 선교사와 일본 관헌들의 회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의 진압을 위해 선교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인 법무대신이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이다.

“당신들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들의 노력을 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일에 기여한다면, 당신들은 많은 봉사를 하는 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들은 인류와 평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강제적으로 협력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요청에 모펫(숭실학교 교장), 에비슨(연희전문 교장), 웰치(감리교 감독), 노블 등은 정치적인 중립의 입장에서 일본 식민지통치를 전제한 ‘통치완화’를 건의했다. 그리고 “정의가 물질적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한국인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했다. 이것은 물질적 착취를 몰각한 추상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이들이 말하는 정의와 자유는 일본 식민지 통치세력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당시 선교사들의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선교사, 한민족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선교사들은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한민족의 하늘을 향한 절규를 듣지 못했다. 에비슨은 오히려 1924년 귀국 시 “조선인은 일본지배 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불신자였으며,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 때문에 3.1운동에 개입할 수 없었다고 기독교 민족운동을 과소평가했다.(박순경 저 <기독교와 민족통일> 한길사)

선교사 대부분은 일본의 총칼에 의한 한국인 탄압을 자국의 선교보고를 통해 변명하기 바빴다. 심지어 웰치 감독과 같은 선교사는 한국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죄로 치부하기도 했다. 애무선도(愛撫善導)를 필요로 하는 동포로 취급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피압박민족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교사의 이 같은 태도는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3.1만세운동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식민지와 외세의 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부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정신대로 끌려간 이 땅의 소녀들을 향해 “돈을 벌기 위해서 스스로 정신대에 들어갔다”는 막말까지 쏟아낸다. 이런 교회지도자들의 의식을 보면서, 국민들의 입에서는 한탄 밖에 나오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일본 지배자세력은 성난 조선민중들의 ‘조선의 독립’과 ‘민족운동’에 대한 열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3.1만세운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일본지배세력은 문화정치와 조선인 동화정책을 펼쳤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쉽게 넘어갔으며, 기독교 민족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국내의 친일인사들은 신일본주의를 표방하고, 일본 중의원에 의원선거법의 조선 시행을 청원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협회장 민원식은 1921년 동경호텔에 머물다가 양근환 열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 중의원은 민원식의 암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배자의 세력들이, 친일적인 인사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국민협회는 해마다 제국의회가 개원되면, 참정권 허용을 건의해 왔다. 그리고 정당 혹은 요로에 건의백서를 제출하는 등 꾸준히 참정권 허용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이 운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지원병제 실시에 이어, 징병제까지 실시하게 되면서 참정권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1944년 ‘외지동포에 대한 처우 개선’의 내용이 발표됐다. 1945년 3월 귀족의원, 중의원 관계법이 개정되고 조선인 7명이 귀족의원에 선출됐다. 23명의 중의원을 선거에 의해 선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패망했다. 귀족의원은 김명식, 박상준, 박중양, 송종헌, 윤치호, 지진용, 박상룡 등이다.

국민협회는 여기에 감사해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윤치호, 김명준, 이성근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처우개선에 감사해서 ‘처우개선과 각오’라는 표제로 신도실천을 맹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민관에서 처우개선 총궐기 전진대회를 열었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허락한 것은 패색이 농후한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전선의 총알받이로 몰겠다는 회유책에 불과했다. 조선인에 대한 육군지원법령이 공포된 것은 1938년이었다.

‘육군지원법령’ 조선청년 총알받이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선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친일파들은 지원병제도의 조속한 실시를 일제당국에 건의했다. 그 중심에 깡패이면서 2번에 거쳐 일본 국회의원을 지낸 박춘금을 비롯하여 조병상, 원지사, 한규복, 윤치호, 이광수 등이 있었다. 일제는 국민협회 후원아래 지원병문제, 참정권문제, 의무교육문제 등을 의제로 재경유지들의 간담회 준비를 서두르는 것을 기회로, 일제는 마침내 조선인의 지원병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박춘금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친일세력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일본군 총알받이로 내 몰았다. 이 때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의 청년들과 학생들을 향해 일본군에 입대해서 황국의 신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연설하고 다녔다. 또한 김활란 등의 여성 지도자들은 젊은 여성들을 향해 정신대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윤치호를 비롯한 박희도, 정춘수, 양주삼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여기에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교회당의 종을 떼어 일제의 전쟁 놀음에 헌납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박희도는 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향해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으며, 양주삼은 신사참배의 결의를 애국적인 발로이며, 국가의식이라고 자진해서 전국교회에 참여를 권유하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일제 36년 한국교회는 조선의 민족개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만세운동이 바로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36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어난 ‘황민화 교육정책’과 ‘문화정책’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양심을 유린당한 하나님을 배신하는 종교적 박해였다.

이것은 한국백성의 수난이었다. 이 때를 기독교의 수난시대라고 사가들은 말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신사참배는 큰 수난이었으며, 고통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 국민의례라고 강변했다. 일부 일제 앞잡이 종교인들도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므로 참배한다는데 동의했다, 우선 학교나, 교회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며, 자신의 신앙양심과 배교행위를 정당화 했다.

분명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었다. 종교적 양심상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신사참배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치욕이었다. 이를 반대하면 3.1만세운동 당시보다도 더 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지도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역자와 교인들은 이런 생각에서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사참배는 배교행위이며, 민족정신을 고수하는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절대로 굴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을 팔아 일제 전쟁 놀음을 후원

일제는 1931년부터 조선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미션스쿨 계통의 학교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2년 일제는 평양에서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 학교 참석을 요구했다. 기독교학교는 교리에 어긋난다고 참석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제는 국민의례만 참석해도 좋다고 통보했다. 여기에 숭실전문과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가 쉽게 넘어갔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일제는 신사참배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먼저 국공립학교에 명령을 내렸고, 총독은 전국지사와 경찰부장, 경찰서장 회의를 소집해 신사참배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불응하는 학교장은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불응하면 학교를 폐쇄키로 결정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맥쿤’이 교장 인가를 취소당했으며, 숭의여학교 스노우 교장도 해임 당했다.

그러나 안식교회를 비롯한 천주교회, 감리교회 등은 일제의 명령에 쉽게 굴복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당시 미국 남장로교 외지 선교국 총무 ‘폴틴 아이비’가 신사참배가 종교행위라고 논증을 폈기 때문이다. ‘폴턴’은 일본 태생으로 일본의 제반사정을 잘 알고, 신사의 본질과 내용을 잘 알고 있는 학자형 선교사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시국이 긴박해지자 총독부는 시국 인식철저에 관한 통첩을 발하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해 각급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시행토록 했다. 여기에 불응한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이 폐교 당했다.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영중 등이 자진 폐교했으며, 군산 영명하교 등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10개 학교가 모두 폐교됐다.

그 후 평양의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실여중도 폐교원을 제출했다. 대구의 계성, 신명,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학교, 보성, 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 정신학교 등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이렇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사이, 기독교 지도층 인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쉽게 무너졌다. 해방 후 신사참배의 문제는 ‘신앙의 양심’을 지킨 교회와 신사참배에 무너진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장로교는 300개의 교단으로 분열돼, 오늘 한국교회가 분열의 역사를 쓰게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은 이전, 선교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영미 교파주의가 고착화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일본 식민지 아래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각 교파는 교단을 복구하기 시작했고, 분열은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교단간의 갈등과 분열은 계속되어 왔고, 분열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한국기독교가 민족종교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목사가 지적한 대로 영미의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가 아닌가(?) 한국교회는 냉철하게 뒤를 돌아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일본기독교인과 한국기독교인들을 이렇게 비교 분석했다.

“일본기독교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립적이며,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일본교회들은 선교사들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일본 교인들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협력했다. 이것은 일본이 세계 5대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인들은 남의 것을 잘 받아드리고 믿으며, 가난하고 감정적이어서 기독교에 더 수용적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선교 130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마저 단체, 교단별로 분열되어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분열에 익숙해져 있고, 이웃교단과 단체,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님보다도 맘몬을 더 섬기는 한국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관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기 분열된 상황서 민족분열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민족의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 한민족이 갈망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는 묘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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