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이브라함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은 물론이고, 식솔들까지 데리고 본토를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다. 오늘 믿음의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약속은 어떠한가. 약속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신빙성을 갖고, 약속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장1-3절)

아브라함은 자손, 명예, 물질, 세계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약속을 믿고 식솔과 가족, 가축을 데리고 새로운 땅을 향해 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고통과 고난이 닥쳐와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의식에 빠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결국 예수님은 이들과 결별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율법주의자는 한마디로 차별주의자이다. 이들은 차별하는데 율법을 동원했다. 안식입법과 정결법에서 율법주의자들의 악행을 볼 수 있다. 오늘날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강남아이와 강남아이 간의 차별을 본다.

예수님은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의 도전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대로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율법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사람을 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회개하자고 말했겠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또 하나님이 3)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라디아서 3장6-9절)

바울이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기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항상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쉬지 않고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소유자는 생명활동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계속해서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차선이 아니면, 차차선을 찾아야 한다.

살기 위해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한다. 착한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가 돈과 명예, 그리고 행복, 승리, 성공을 추구한다. 성공이 무엇인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을 승리, 성공으로 생각한다. 이러는 사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다. 요즘 정치인과 언론인, 종교인들을 보면서, 율법주의에 찌든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오늘날 이들이 천사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나라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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