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래를 꿈꾸자

다사다난했던 2019년은 역사 속에 묻혔다. 대신 경자년 2020년 희망찬 새아침이 밝았다. 칠흑 같은 장막의 어둠을 걷어내고 장렬한 태양이 용솟음 쳤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바라는 아침, 한국교회도 화합과 일치의 한 해를 꿈꿔본다.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지는 원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실현되는 새로운 미래, 하나님나라도 소망해 본다.

지난 한 해를 뒤 돌아보면서, 과연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운동과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운동에 충실한 한 해 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2019년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갈등도 모자라, 국민들을 진보와 보수로의 분열과 갈등, 진영싸움을 만들어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분명 이것은 신을 성전에 가두어 놓고, 신을 모독하며, 국민분열을 조장했다.

여기에다 여야정치인들은 당파싸움에 매몰돼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경재보복과 중국과 러시아의 대한민국 영공침공, 미국의 군사 부담금 터무니없는 증액 요구, 북한의 끝없는 미사일 발사 등으로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국민들은 곤궁한 상황에서도 정부를 믿고, 슬기롭게 대처했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주어야 할 한국교회는 ‘로마팍스’를 말하며, 국민들을 절망에 빠트렸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그 자리에 모 단체의 대표회장으로 대치시키면서, 한국교회는 지난 12월 혼란에 빠졌다. 교인들마저 이 대표회장의 ‘신격모독’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한국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교회 주요 8개 교단은 이 대표회장에 대해 이단연구에 들어갔다. 이 대표회장의 말 한마디에 쓰러지는 이 단체에 속한 목사들의 모습은, 이들이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이 대표회장의 종인가. 착각 할 정도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어떠한 희망도 걸 수 없다. 분명 한국교회는 ‘자유대한민국’을 주장하며,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그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미사는 달러가 되었다. 아니 신의 자리에 한 인간을 앉혔다. 이 대표회장은 “하나님 까불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새해를 맞은 한국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고 기던 길을 멈추고,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성전 하나님, 성전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 지난해 일본경제복과 일부 목사의 이탈 행의와 쟁쟁만 일삼는 정치인들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국민들에게 새로운 미래,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봉사하자

오늘 한국교회가 분열된 상태서,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말 할 수 없다.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서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는 묘연하기만 하다. 일본의 경제침략과 정치권의 조국 장관을 둘러싼 정쟁,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침략, 정부와 ‘로마평화’를 내세워 정부와 맞서는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모습은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외치는 평화는 예수님의 평화가 아니다. 목회자의 메시지는 대부분 ‘로마팍스’로 일관되어 있다. 평화를 노래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 ‘좌파’로 매도하며, 북한에 맞서는 안보논리, 무기개발 구축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오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로마팍스’는 관념에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교인들까지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가 자리잡아가는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친일적이며, 군사정부에 대해서 최고의 협력자였다는 사실. 조찬기도회를 주도하며,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해 주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이미 예수님의 평화에서 이탈해, ‘로마팍스’, 힘에 의한 평화를 말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기득권세력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성서의 예언자전통과 예수님의 선교전통서 이탈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는 대한민국의 문제이며, 남과 북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의 땅에서 남과 북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 스스로 논의하고, 해결하지를 못했다. 모두 외세에 의해서 결정됐고, 결정되고 있다. 우리정부가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평화협력지구로 지정해 남과 북, 국제사회가 함께 한반도 번영을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 내자는데도, 여기에 대해서 찬반논쟁이 일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는 외세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와 보수 정치인들이 일본과 미국에 얽매이는 것을 보면, 이것은 극명해진다. 지금까지 남과 북의 통일문제는 모두가 정부의 점유물이었으며, 국민은 통일문제를 말하지 못했다. 민간이 통일문제를 말하면, 그것은 빨갱이이었고, 용공이었다. 오늘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영논리가 명확해 지는 것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어디인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 아닌가. 한국교회는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민족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남북한 아니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이다.

그래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양보할 수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된다. 그 만큼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절실하다. 그것은 한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모두가 여기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정치적인 이해와 관념 때문에 적대적인 관계를 조성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세계분단의 중심에 세계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세계교회는 세계분단을 극복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민족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분단의 중심으로 들어가 남북한민족의 화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헌데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와 권위주의, 권력지향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반통일적인 모습을 과거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일이 되었을 경우,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가던 길을 멈추고,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다. 한민족의 신앙공동체인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과거 지배 이데올로기와 권력지향적인 편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한민족 선교로 전화하자

한국교회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잃어버린 한민족선교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이제 한국교회도, 한민족의 소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대해서 응답해야 한다. 분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교회를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배신하는 반민족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는 영미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분단 상황을 고착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020년 새해에는 한국교회는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자. 오늘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지배이데올로기 신학과 신민지 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것이 복음의 진리인양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복음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총이다. 복음은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경 속에 담겨진 참된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서양의 지배이데올로기적인 복음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실패했다. 그 실패의 규정은 복음의 본질로부터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실패한 영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신학과 식민지신학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새롭게 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요구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응답하는 것이다. 하늘을 남한만 가질 수 없듯이, 하나님나라는 남북한 민족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복음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시키고, 500년전 컬럼버스가 스페인을 떠나면서 기독교의 세계화를 부르짖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들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유럽인만의 보편적 세계질서를 뿌리내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문제는 분열과 갈등에 익숙해진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화해의 종교,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 희망의 종교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통일 이후 북한선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이 헌금을 다른 곳에 유용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평화’, 샬롬을 노래해야 한다. 하나님의 평화는 역사적 현존이며,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참평화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무력적 통치 아래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종속관계에서 유지된 평화, ‘팍스’가 아니다. 팍스는 권력이 만들어낸 평화이다. 한마디로 신민지 민족들의 정의를 짓밟으면서 만들어낸 거짓평화이다. 화해와 정의가 실현된 상태의 평화가 참평화이다.

한민족의 통일은 샬롬이 팍스를 뚫고 들어가 변혁시켜야 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며, 그리고 실천되어야 할 과제이다. “통일은 쌍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위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7.4공동성명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평화협정, 군비축소, 반전반핵 등으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현존인 정의와 평화의 세계는 우리의 역사 현장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은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위에 이루려는 하나님나라운동의 실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협을 비롯한 한교연, 한기총, 한교총 등 연합단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이제라도 평화적인 민족통일운동에 응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 방관하는 것은, 선교초기부터 분열과 갈등을 조장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벨탑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분명,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2020년 선교적 과제는 민족통일의 과제로서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이고, 복음의 요청이고, 선교의 요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복종이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사랑과 정의, 생명이 흘러넘치는 통일된 한민족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다.

남북한의 적대관계가 화해의 무드로 전환되고, 북한이 개방되어, 부산에서 만들어진 신발이 경부선을 타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유럽을 거쳐 영국까지 간다고 생각해 보라. 또한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과 티벳을 거쳐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간다고 생각해 보라. 한미 FTA 재협상도 두렵지 않다. 신바람이 나지를 않는가. 2020년 경자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봉사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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