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모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났다.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분명 모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또한 여호와께서 직간접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아야 한다. 장성한 성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매일 부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이름을 짓고,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직접 부를 수도 없다. 성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애급의 백성들이 이집트의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하면서, 고난을 당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서 해방시켜주셨다. 그리고 모세와 약속한 가나한 땅으로 들어가게 했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 땅을 소유하고 산다. 이브리인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숙한 인간의 삶을 약속한 것이다. 독립된 삶을 살기를 원한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절대로 부모를 바라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부모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결국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을 일으킨다.

자식의 앞날에 참견하는 부모는 자식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길에 방해만 하는 결과를 일으킨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의 파라오 압제 밑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찡찡 거렸다. 하나님은 이럴 때 또라졌다가도 바로 돌아서 이들을 버리지 못하신다. 너희에게 새로운 땅 가나안을 주었으니, 독립적으로 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육하고, 광야에서 40년동안 훈련시켰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헤롯을 향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의 영혼을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그만큼 강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 약자를 보호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아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의 앞에서 항상 떳떳했다. 신앙의 양심을 지켰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예의 시대는 지나갔으니, 이웃을 돌보며 살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세상을 만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앙공동체 일원으로 살아야 한다. 일본이나, 중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빠져 난리를 치는 것은 분명 국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모든 것을 감추려고 한다.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마음대로 흔든다. 민주화를 이룬 국가는 그렇지 않다. 오늘 화제가 되고 있는 ‘기생충’은 자유하는 영혼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유한 영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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