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난세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동족을 구명했으나 거친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비극을 초래한 고사가 있다. 저 옛날 이스라엘을 힘센 장수들이 다스리던 시대 입다 이야기다. 입다는 므낫세 족 가운데 길르앗 사람이 창녀에게서 난 아들로 힘이 장사였다. 그러나 천한 계집에게서 태어났다하여 집에서 쫓겨난 입다는 폭력배들과 어울려 살았다. 마침 암몬 족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밀려오자, 길르앗 부족의 원로들은 힘이 장사인 입다를 찾아가, 암몬과 싸워 이기면 자기들의 우두머리로 삼겠다고 회유하여 전쟁터로 보낸다.

입다가 암몬과 싸워 크게 이기고 개선하자, 함께 싸우자는 입다의 청을 거부한 에브라임 부족 사람들은 장래 일이 불안했다. ‘암몬을 길르앗 사람 입다가 물리쳤으니 틀림없이 우리를 보복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지레 짐작하고 입다에게 몰려가서 ‘왜 우리를 빼놓고 암몬과 싸웠느냐며 너희를 모두 불태워 죽이겠다’고 겁박한다. 입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도와달라고 할 때는 거절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수작을 벌이다니! 화가 치민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을 도륙하기 위해 요단강에 진을 쳤다.

마침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사람은 구음이 달랐다. 강을 건너는 사람마다 ‘쉬볼렛’이라고 발음하게 하고, 만일 ‘시볼렛’이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쳤다. 이렇게 해서 죽인 에브라임 사람이 무려 4만 2천이나 됐다(사사기 12:6). 에브라임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는 하지만, 입다는 포악한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발음 하나로 동족을 무차별로 살해하여 요단강을 피로 물들인 것이다. 그가 죽인 사람들 가운데 에브라임 사람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입다에게 반기를 든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입다는 위기에 처한 동족의 부름을 받고 무남독녀를 번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자기를 희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승리 뒤에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온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인간의 성정이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의 승리’ 뒤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따른다. 그리하여 개혁교회 신학은 결코 ‘인간의 승리’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승리’를 말한다. 인간의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압승했다. 유권자들은 그들을 지켜볼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