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한글 ‘죽이다’는 넓은 의미로 두루 쓰이지만 영어와 한자는 다양하다. 예컨대 kill, murder, slay, 살(殺), 시(弑), 도(屠), 륙(戮) 등이다. 십계명의 여섯 번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한글로는 번역본의 차이가 없다. 영어 성경은 You shall not kill (KJV, NJB), You shall not murder (NRSV, NIV)로 미세한 차이나 드러난다. 전자는 합법적이거나 실수로 죽이는 경우이라면, 후자는 의도적, 곧 악의적으로 살해하다는 뜻이다. <Carasik, 162> 최근 영역은 대부분 후자를 따르고 있다(GNB, CEV). 히브리어 ‘죽이다’는 낱말이 여럿이다. 카탈(לטק)은 가격하다, 멍들게 하다 등을 뜻하며 드물게 사용된다. 주로 짐승을 죽일 때 쓰이며 영어 slay, 한자로 도(屠)에 해당한다(시 139:19; 욥 24:14). 하라그(גרח)는 160여 차례 나온다. 죽이다, 살해하다, 파괴하다는 뜻으로 원한을 품고 살인하는 경우와(창 4:8) 멸절시킨 예도 간혹 발견된다(삿 9:5; 에 3:13).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살해는 이 범주에 포한된다(창 20:4; 출 4:23; 13:5; 22:24; 시 59:11; 암 2:3). 그러나 적과 교전 중에 상대를 죽이거나 강도와 싸우다가 살해한다면 정당방위다(민 25:5; 출 32:27; 신 13:10). 따라서 영어 kill, destroy 등으로 번역하여 살인의 불가피성을 최소한 확보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또 다른 히브리어는 헤미트(תימה)다. ‘죽다’ 무트(תומ)의 사역형으로 200 차례 넘게 사용되었다. 대체로 전쟁이나(수 10:26) 왕의 명령으로(출 1:16; 에 4:11) 죽이는 경우, 도시를 멸망시키는 행위다(삼하 20:19).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 되는 경우도 위의 ‘하라그’와 동의어처럼 쓰인 적도 있다(신 32:39; 삼상 2:6; 사 65:15). 나카(הכנ)는 히필형에서 치다, 죽이다는 의미로 적어도 95차례 이상 언급된다. 문자적으로 타격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나 전염병이나 질병에 의한 죽음(출 3:20; 신 28:22), 집단적 파멸이나 한 지역의 몰살 등을 가리킨다(창 14:7; 수 8:24).

라차흐(חצר)는 제6계명을 이해하는 가늠자다. 구약에 40여 차례 이상 활용되었다. 이 동사는 오직 사람을 살해한 경우에 쓰인다. 전쟁이나 법의 집행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살인과 다르다. 경우에 따라서 명백한 살인(시 62:3)과 정의 실현(민 35:30)을 가리킬 때도 있다. 대부분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상황에서 언급된다(신 4:42; 19:3-4; 수 20:3). 사실 도피성은 실수나 부주의에 의한 살인에만 허용되었다(민 35:6, 수 20:3,4).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표되는 동태복수법(lex talio)에서 확인하듯(출 21:23-25) 살인금지는 자칫 피의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라콕, 133-34>

전통적인 주석은 라차흐의 소극적인, 곧 최소한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해왔다. 예컨대 라차흐가 통용되는 공간을 계약 공동체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반사회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살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의무를 ‘살인하지 말라’와 연결함으로써 살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면서 야웨 주도의 계약 공동체를 세우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랍비들은 훨씬 근원적이며 폭넓은 시야로 라차흐의 범주를 살펴본다. 곧 동료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모독하는 경우, 여행자들에게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지 않아 재산상의 손해가 나게 하는 경우까지 여기에 포함시킨다. 12세기 유대인 현자 이븐 에스라의 경고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손이나 말로 살인할 수 있고 비밀 발설이나 인신공격으로 죽일 수 있다. 또한 부주의와 무관심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으며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구조하지 못한 경우도 살인에 해당한다.”

지금은 살인에 대한 더 정교하고도 예민한 분석과 정의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성서의 라차흐를 현실에 비추어보자면 낙태와 안락사를 넘어 테러, 아동 학대, 협박과 폭언, 왕따, 인격모독, 성적 학대, 데이트폭력, 경제적 착취, 그루밍 범죄, 갑질, 합법을 가장한 착취 등이 두루 포함될 수 있다. 결코 문자적인 의미로 가둘 수 없는 명령이다(마 5:21-24). 살인이란 사람의 영혼을 짓밟거나 죽여서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다.<김용규, 323> 제6계명은 창조주 야웨로부터 비롯되며 귀속된다. 오직 하나님만 생명을 주관하시며(욥 12:10)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마 16:26).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1:26-28; 9:6) 이 계명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예외 없는 금지명령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필연법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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