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정을 주었다. 가정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적 선물이다. 이 가정이 문명의 이기로 해체되고 있다. 부모의 이혼을 비롯한 가정폭력, 결혼기피, 존속살인, 아동학대 등으로 인해 사회적 기초인 가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도, 국가도 건강하다. 그런데 산업의 발달로 발생한 문명의 이기는, 인간성의 파괴는 물론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가정을 해체시키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 년 동안 동성애를 비롯한 차별금지법, 인권법 등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여왔고, 지금도 벌이고 있다. 동성애의 문제는 오늘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문제가 됐다. 동성애는 분명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결혼과 건강한 가정생활서 이탈했다. 반도덕적이며, 반윤리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국교회를 비롯한 천주교 등 종교계에서 한목소리로 동성애 반대운동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세기 2장 18-25절)

기독교가 불교, 도교, 유교 등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궁극적으로 자아를 잃지 않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누구나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드리기를 원한다. 이것은 인간의 갈망이며, 욕망이다, 모든 사람의 삶 밑바닥에는 근원적인 합일에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려고 한다. 불교는 자신의 욕망, 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만물과 하나 되려고 한다.

도교는 인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합일하고, 동화되려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정한 합일을 추구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고, 화해를 이루려 한다. 황홀한 상태나, 무아지경에서 합일에 이르는 게 아니라,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자연과의 관계와 사귐 속에서 합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이웃종교와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리라고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이웃과 나누는 사랑의 종교이며, 평화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 속에 성적인 욕망을 주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려는 갈망이다. 이 갈망은 자녀, 생명을 낳음으로서 실현된다. 자녀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되는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질서이다. 창세기 2장 18-25절의 말씀에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위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교육하고 있다. 가정은 인간애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훈련소와 같다.

 

교회, 풍성한 인류의 삶을 만드는데 참여하자
가정은 하나님이 준 천부적인 것, 어떤 것으로도 해할 수 없다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

자신 안에 갇힌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위대한 선물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아담의 일을 거둘 짝을 만들어 주려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 집짐승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름을 짓도록 했다.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이름을 붙여주는 이유도, 부자간, 부녀간, 모자간, 모녀간의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하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명의 끈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엄마가 자녀를 가슴에 품고, 젖을 물리는 이유도, 서로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생명의 끈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엄마의 유두를 ‘생명의 젖 줄’이라고 했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적 위대한 선물인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모르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생명을 이어간다.

아담은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애정을 쏟았지만, 짝을 찾지 못했다. 짐승은 인간의 짝이 될 수 없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담과 짐승 사이에서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짐승을 사랑한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열어 상대방을 받아드릴 수 있는 인정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동성을 더 사랑하는 세태가 되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생명을 이어가라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를 몰각한 것이다.

요즘 공원과 거리마다 애완동물로 넘쳐난다. 이것은 진정한 인간관계가 틀어진 결과가 가져다가 준 것으로 해석된다. 인간은 이웃과의 관계가 상실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참된 인간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병적으로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풍조가 우리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동물을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동성 간에 결혼하는 것도 성서에서 크게 이탈했다.

아담은 짐승에게서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자아를 상실하고 이웃과 단절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개집에 난방장치와 냉방장치를 해놓고, 애완동물이 병에 걸리면 자가용으로 병원에 간다. 개의 머리에 파마까지 해준다. 그런 정성과 노력을 고통 받는 이웃에게 쏟지 못하는 것은 이웃에게 이르는 사회적 통로, 관계가 단절되고, 사람의 마음에 병이 들었으며, 인간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승을 사랑하며, 모든 정성을 쏟는 일부 사람들은 “사람은 배신해도, 짐승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합리화 시킨다.

하나님은 짐승들이 아담의 반려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하와)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축복이다. 또한 하와도 아담과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짐승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아담마저도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하와만큼은 가슴에 있는 갈비대로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졌다.

여자가 남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자녀로 창조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이 준 것이며, 천부적이다. 따라서 신성불가침이고, 인간이 만든 어떤 것으로도 침해할 수 없다. 양도 할 수도 없다. 때문에 폭력으로 자녀와 이웃을 해 할 수 없다. 합일을 이룬 여자와 남자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헤어질 수도 없다.

너의 마음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아담은 하나님이 만든 여자를 보자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고 외쳤다. 아담은 수많은 짐승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짝을 여자에게서 발견하고 사랑 할 수 있었다. 짐승들은 거리가 있고, 다른 존재였다. 아담은 나와 똑같은 존재, 참으로 대화가 통하고, 서로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을 이브에게서 찾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꼭 맞는 존재, 아담의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들어 짝으로 맺어 주셨다.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창조질서에 속한다. 기독교계가 한목소리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이태원서 발생한 ‘코로나19’바이러스 집단감염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는 곧 국민 모두를 또 다시 ‘코로나19’바이러스 공포로 몰아넣었다. 너와 그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을 생각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성직자와 교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반대한다. 국민들도 이해하지를 못한다. 다만 한국교회는 이들에 대해서 긍휼이 여기고, 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설 수 있도록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를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비롯한 차별금지법, 인권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적인 사람이나, 보수적인 사람 모두는 원칙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마치 세계기독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동성애를 찬성하는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그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세계기독교협의회는 교단들이 가입한 협의체이다. 전체 회원교단이 합일에 이르지 못하면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 이 단체에 가입하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동성애를 분명하게 반대한다는 사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역시 한국교회의 정서상 동성애를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다. 여기에 가입하고 있는 교단의 일부 교회가 ‘소수자의 인권’을 내세워 반대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결혼, 인류의 생명 유지하는 방편

남녀 사이의 하나 되는 본능적인 갈망은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인류의 종족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인류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편이다. 남녀의 애정은 죽음보다 진하다. 그래서 남녀 간의 애정이 식으면, 자살하고, 살해한다. 모든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 결혼을 하여 아들과 딸을 생산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을 실어 나른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은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문제는 현대 젊은이들이 나만을 생각한 나머지 결혼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 속한다.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수년 동안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인권법을 적극 반대해 왔고, 지금도 반대하고 있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 소유욕과 지배욕이 생기면서, 남녀의 사랑, 섹스는 부끄러운 것, 추한 것이 되어 버렸다. 타락하기 전에는 알몸으로 지냈어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타락한 이후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렸다.

오늘 현대사회는 남녀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내맡기고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대가 아니다. 상대를 평가하고 비교하고 의심하며 자신을 숨긴다. 일편단심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깊은 분열과 갈등만 깊어진다. 이는 남녀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물론, 가정이 해체라는 결과를 낳는다. 진한 애정이 식으면, 서로를 살해한다. 자녀도 살해한다. 나를 개방해 너를 온전히 받아드리지 못하는 결과는 이렇게 아픔만 가득하다.

가정을 지탱해 주는 자녀 기피하는 사회

현대인은 결혼이 온전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다 현대사회는 결혼생활을 아름답고 온전하게 유지해 주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사회는 여성들의 생활능력이 강해지면서, 결혼생활을 기피한다. 또한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결과이이다. 이제 대한민국도 이혼이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이혼율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가정을 지탱해 주는 제3의 끈도 끊어졌다. 모두가 자식 낳기를 기피한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 마음을 주고, 너의 마음을 받아드릴 이유도 없다. 옛날 봉건시대는 한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죽음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헤어지는 일이 없었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이혼’이란 단어가 없었다. 옛날 농경시대는 부부가 하루 종일 함께 논과 밭에서 일을 해야만 가족 모두가 살았다. 한마디로 부부가 완전한 생활공동체였다.

아내는 길쌈하고 바느질해서 남편과 아이의 옷을 지어야 했고, 밥을 해야만 했다. 남편은 밭을 갈아 식량을 생산했고, 나무를 해 와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부부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오늘 현대사회는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아주 짧아졌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과 생활하다가 밤에만 얼굴을 대하고,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간다.

집은 잠시 쉬어다가 가는 쉼터가 되었다. 오히려 남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게다가 가정을 지탱해 주는데 강력한 힘인 종교나, 도덕의 힘도 무너졌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아이의 출산도 기피하고 있다.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서 이탈하면서, 인간생활의 기초인 가정이 흔들리고, 깨지고, 파괴되고 있다. 아이들은 거리로 내 몰리고 있다. 부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교회는 이미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대신할 사랑은 인류사회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약점과 비밀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다. 가정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있어도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내놓고 맡길 수 있는 곳, 한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곳은 가정밖에 없다.

성서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가정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교육하고 있다. 생활의 리듬, 생각, 느낌을 서로 조정하고 맞추어야 가정의 평화는 물론,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나 자신의 무게의 중심을 상대방에게 두어야 한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 한 가정의 평화는 없다. 소망도 없다. 남녀가 동일선상에서 직접 부딪치면 분명히 가정은 깨진다.

이런 사이에서 아이들은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가정의 해체로 인해 새엄마와 새아빠에 의해 많은 아이들이 폭력에 시달리며, 죽임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는 건강한 가정,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인간 사이의 참된 사랑의 중보자가 되라

키에로 케고르는 평생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없었다. 약혼녀와 파혼했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될 경우에만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고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 국민계몽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던 산아제한은 인구절벽이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구가 끝없이 줄어들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정부의 대책은 한 없이 쏟아지지만 실효성은 없다. 젊은 남녀는 돈만 있으면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기 때문에 굳이 가정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고. 동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사랑한다. 동성애자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남녀 간에 사랑을 해서 결혼하고, 너와 내가 합일에 이르는 생활공동체는 인구절벽에 이른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애국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참여하는 일이다. 현대인은 인간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이탈해 멋대로 살아간다. 그렇다 자식을 낳아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보존하는 시대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이며, 위대한 선물인 가정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데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교육해야 한다. 여의도교회 등 일부 교회에서 아이를 낳은 가정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를 통해 사랑과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풍성한 인류의 삶을 만들어 가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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