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길게 서술하면서 목격자로서가 아닌 “내가 (전해)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라고 증언자 입장에서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한다. 바울은 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살아나셨다’ 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메시아는 항상 존재했다. 그들의 메시아는 다윗처럼 통일왕국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고, 스가랴가 묘사한 것처럼 어린 나귀를 타신 분이기도 하고, 이사야가 갈망한 것처럼 백성들의 죄를 속량할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전에 존재했음에도 지금은 백성들의 영혼에서 더 이상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식으로 바울은 말한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죽으신 분이다. 그리스도가 어찌 죽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렇게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갖가지 은유를 동원하여 집요할 정도로 부활 자체보다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바울에 의하면(고전 15:42-44) 삶에는 썩는 삶이 있고 썩지 않는 삶이 있다. 욕된 삶이 있고 영광스러운 삶이 있다. 육의 삶이 있고 영의 삶이 있다. 썩게 될 육의 몸이 있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부활의 삶인가? 예수께서 사신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심 역시 부활의 삶의 연장선에 있다.

바울서신보다 뒤에 기록한 복음서가 빈 무덤을 증언하는 이유가 있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교회가 아닌 산 자를 위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빈 무덤 안의 청년의 말이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거기서 뵈오리라”(막 16:7).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삶은 십자가 죽음을 불러들였고, 그가 죽으심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그분이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죽인 곳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죽이는 곳이다. 결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실 곳이 아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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